초기 선교정책 목표는 자립 이루는 토착교회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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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선교정책 목표는 자립 이루는 토착교회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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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8.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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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한국교회의 선교정책과 적용

한반도에서 선교를 하면서 선교사들은 불필요하게 경쟁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선교지를 분할할 필요성을 갖고 회합을 열었다. 우선 장로교 선교사들의 회합으로 1889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와 호주 선교회가 선교연합공의회를 구성하는데 합의 했었으나, 1893년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회가 들어와 미국 남북 장로교회를 위한 장로회공의회를 먼저 구성하였다. 그리고 캐나다선교회와 호주선교회가 참여하여 한국에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는데 합의하였다.

5000명이 넘는 도시나 특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역을 제외하고 분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는 일본에 주재했던 감리교 포스터 감독의 반대로 인정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교파 선교회 역시 상당히 오래도록 비공식적인 합의에 따른 선교지역분할을 유지하였다. 또한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장로교와 감리교는 협의를 통해 북간도 선교구획을 정하였다. 또한 장로교 간에는 분할선교원칙이 잘 이루어졌는데, 전라도와 충청도는 남장로교, 경상도는 호주장로교, 원산과 동해안 지역에서 캐나다 선교회, 미북장로교는 서울, 평양을 중심한 서북지방의 선교를 담당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 초창기 선교사들은 목회나 선교경험이 없었고 선교본부에 따라 선교의 방향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상호간에 선교정책을 논의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1890년 6월에 서울에서 7명의 장로교 선교사들은 중국에 선교하고 있던 존 네비우스(1829-1893)를 초청하여 그의 경험을 통하여 제시했던 정책들을 한반도를 위한 선교정책으로 채택하게 되었다. 네비우스는 프린스턴신학교 출신으로 중국 산동성에서 30여년 활동했으나 별 선교성과를 이룩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의 그의 선교정책의 적용은 성공적이었다고 역사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네비우스의 선교정책 목표는 독립과 자립을 이루는 진취적 토착교회 수립이었다.
알렌 클라크(곽안련)은 그의 콜롬비아 대학 학위논문에서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내용을 자세히 정리하였다.

선교사들은 순회하면서 전도하고, 신자마다 배워 독자적으로 선교하도록(자립전도), 장차 목사가 될 시찰회의 조사들(조력자)은 보수를 받되 신자들의 회는 무보수로 전도하도록 양성(자립정치), 교회의 건물은 신자들 스스로 마련하고 신자회가 구성되면 조사들에 급료지불(자립경영) 등의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체계적 성경연구, 엄격한 훈련과 치리, 타 교회 기관과의 협력 등을 역시 네비우스 선교정책과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

1893년 한국장로교회공의회가 제정한 선교규칙은 이러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한국 실정에 맞는 선교정책들이 확립되었다. 감리교 역시 이러한 선교규칙들에 직간접적으로 참여 활용하였다. 물론 한바도에서의 선교는 네비우스의 선교정책을 넘어서고 있었으나 네비우스가 초창기 한국선교에 끼친 영향이 컸었음을 권위 있는 연구가들이 연구를 통해 뒷받침해 주고 있다. 제정규칙에 전도는 상류층보다 근로계층에, 부녀자의 귀도와 청소년 교육, 초등학교 설립하여 재학 남학생들을 교사로 양성 지방에 파송, 교역자 배출준비, 빠른 시일 내에 정확한 말로 성경번역, 순 한글사용을 목표, 자립하는 교회와 헌금하는 교인수 증가, 자전위한 전도인 훈련, 환자에게 전도 등을 포함하였다.

한국에서의 선교는 성공적이었다. 1906년 선천선교지부의 보고에 따르면 학교가 56개가 세워졌고, 그리스도교신앙을 가진 학생들이 1,192명이었다. 학교는 운영을 위해 선교사들로부터 후원을 받지 않았고, 건물을 가진 교회가 70곳이나 되었는데 두 교회를 제외하고는 선교회로부터 역시 보조를 받지 않았다. 1910년에는 전국교회의 80%가 자립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복음에 대한 놀라운 반응과 갑작스러운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성장은 선교사들이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윌리엄 캐리는 가능하다면 선교의 시작과 더불어 피선교국의 사람들을 교직자들로 교육하고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교회선교회 총무였던 헨리 벤은 1854년 선교 목적은 자립정치, 경영, 전도의 교회를 이룩하여 선교회는 교회를 설립 후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벤의 교회 설립 후 곧 그 지역을 떠나야 한다는 주장은 스테판 닐에 의하여 반박되었다.

선교사들은 목회자 양성을 위한 사안을 처리하면서 네비우스의 생각을 따랐다. 1896년 이눌서는 목회자 양성원칙에 대한 글을 통하여 소명감이 투철하고, 희생적이며, 진실하고 자존심이 있는 사람을 목회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 교회는 일찍부터 재정적으로 자립하는 교회가 되었고, 선교시작 20년쯤 지나서 선교사들로부터 교회 자치권을 확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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