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혁명으로 교회와 국가의 결합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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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으로 교회와 국가의 결합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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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2.1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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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과 유럽의 그리스도교

미국의 독립전쟁을 돕는 일에 실패했던 프랑스는 경제적인 위기를 맞게 되었다. 절대왕정이 지배하고 있었던 프랑스는 백성들의 불만이 증대되어 1789년 7월 14일 대혁명이 일어나 1794년 7월 27일까지 진행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을 전 후하여 유럽사회는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절대군주가 몰락하였고, 국가의 지배권이 귀족에게서 시민들에게로 넘어갔다. 처음으로 수세기 동안 이어온 교회와 국가의 결합이 해체 되었다. 미국이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될 때에 헌법에 제정되었던 교회와 국가의 분리는 프랑스에서처럼 적대적이지는 않았었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의회(1789-1792)는 교회에 중요한 정치적인 조치를 취했다. 교회의 재산을 국민들의 소유로 선언하였고, 모든 수도원과 수도회들을 해체하였으며, 시민법으로 인해 성직자들은 국가기구 아래 놓였다. 또한 성직자들은 시민들에 의하여 선출될 뿐만 아니라 국가와 헌법에 충성할 것을 서약하도록 요구받았고, 성직자들은 이러한 조치에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또한 이어지는 국민의회(1792-1795)에서 그리스도교의 연호와 축제들을 폐지하였고 결혼은 성례에서 제외하여 시민의 일로 선언하였다. 수많은 교회들이 황폐화 되었고, 귀중한 예술품들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다. 1794년 로베스피에르 통치하에서는 이성과 “최고의 존재자”를 숭배하는 새로운 종교의식을 만들어 공포정치를 가속화 하였는데, 이러한 반교회적인 조치들이 시민들의 저항을 받아 1795년 그 끝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일 후로 국가와 교회의 분리는 지속되었다. 1800년대는 교회와 신학의 역사에 있어서도 뚜렷한 분기점을 이룬다. 계몽주의 이후에 지속되어왔던 세속화는 더욱 가속되었다. 19세기의 산업화 물결은 교회에 커다란 도전을 주었다. 한편 1799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일통령에 취임하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는 1801년 7월 15일 로마 가톨릭교회와 협약을 체결하여 교회를 복고시켰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프랑스 시민들의 다수의 종교로 인정되었지만 교회는 국가의 감시 하에 놓였다. 교황이 새로운 감독들은 서임할 수 있었으나 교회의 재산들은 혁명을 통해 상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1804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황제로 통치하였다. 이러한 프랑스 혁명은 독일제국의 종말을 가져왔고, 교회의 국가와 사회와의 관계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1803년 레겐스부르크제국 의회에서 이제까지의 정치적이고 법적인 토대를 파괴하였다. 전 성직지배의 해체와 교권을 제후의 제량 아래에 귀속시켰다. 이는 교회재산의 세속화를 의미한다. 방대한 수도원과 교회의 재단과 교구의 소유권이 지역통치자의 영향아래 놓이게 되었다. 많은 수도원들이 해체되었고 10세기 이후 형성되었던 “오토제국교회 체계”가 붕괴되었다.

1806년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의 형식적인 종말과 프랑스의 영향으로 나폴레옹법전과 시민법 모음이 독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1813/14년의 나폴레옹에 대항한 독일의 해방전쟁은 독일의 민족운동을 자극하였고, 1814/15년의 비엔나 회의를 통하여 유럽의 새로운 질서가 군주적인 국가형태 속에서 이루어졌다. 독일에는 독일연맹(1815-1866)이 세워졌다. 시대에 적합한 교회의 이해와 교회의 개혁을 위한 노력은 19세기를 규정하는 교회사적인 주제이다. 스타인-하르덴베르크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프로이센의 연합과의 관련 속에서 슐라이에르마허는 1808년 루터교와 개혁교회 사이의 연합을 장로적-노회적 제도와 하나의 교회예배개혁의 도입과 결합 안에서 계획하였던 교회헌법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루터 95개 논박문 게시 300년을 기념하는 1817년 프로이센의 연합과 더불어 같은 해 9월 27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외적으로 분열되어있는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신앙고백의 일치를 위하여 소집하였고 관련자들의 매우 적극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연합을 위한 노력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고, 1834년에 프로이센연합에는 교회가 연합된 교회와 루터주의교회, 개혁교회 셋으로 형성되었다. 19세기 연합을 위한 노력은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시대에 신조들의 대립의 후퇴와 교회들 사이의 일치의 노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시대에 맞는 교회헌법에 대한 노력은 계몽주의적인 개혁을 자극하였는데 이일을 위하여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하나로 일치된 연합교회를 이루지 못하였고, 단지 교회와 국가의 행정적인 분리가 1850년 프로테스탄트교회 최고 관리위원회(오버키르헨라트)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또한 19세기 엄청난 선교활동력의 뿌리는 각성운동 속에 있었으며 우선적으로 독립적인 선교단체들로부터 시작하여 19세기 중반부터 점차적으로 독일교회자체의 일로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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