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나눔을 사사화(私事化)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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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나눔을 사사화(私事化) 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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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5.14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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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금 목사 / 강남교회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베드로가 ‘산 위의’ 성스러운 장소에서 주님을 모시면서 내적으로 평안한 삶을 살려고 결심한 그 때, ‘산 아래’에서는 한 사람의 아들이 귀신이 들려 고통을 겪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베드로가 산 위의 거룩한 장소에 머물러, 그 거룩에 취해 산 아래의 고통을 잊어버린 것처럼, 한국 교회 또한 교회 내적인 일에만 머물러 교회 외적인 고통의 문제를 잊어버린 적이 많다. 또한 한국 교회는 복음을 철저하게 사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교회 외적인 일에 관심을 갖더라도 사회봉사 차원에서만 관심을 갖지, 사회구조의 변화 측면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복음의 ‘사사화‘는 영성을 이해하는 데에서 보여진다. 보통 영성이라고 하면 기도생활, 개인경건생활 등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회는 개인적인 영성을 강조하여, 사회와는 유리된 채 외딴 섬에서 사는 것과 같은 생활을 온전한 신앙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예언자적인 정신을 상실한 것이며, 사회에서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예수의 나눔을 소극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적극적인 실천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의 나눔은 자선 뿐 아니라 사회의 구조악을 바로잡는 사회참여적인 실천도 포함해야 한다. 정치, 경제, 통일, 노동 등의 공적인 문제에 예언자적으로 사회참여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 또한 예수의 나눔을 실천하는 한 가지 방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나눔을 사회복지 차원에 그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예수의 나눔을 사회적인 영성과 결합시켜 사회발전에 책임이 있다는 각오를 가지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하늘의 메신저가 되어야 한다. 산 아래 사람들의 고난을 심리적으로 위로하는 차원을 넘어 복음으로 구조적인 악까지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나눔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종교적인 사회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회가 점차 과학적인 이성에 기초하여 합리화됨에 따라 종교는 마술이고 미신이기에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계몽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달리 현대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더욱더 종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계몽주의적인 자유가 세상에 널리 퍼질수록 신기하게도 종교적인 열정은 사라질 줄 모르고 정치와 맞물려 인간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세속화의 부정적인 면들을 보고 다시 종교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는 현대는 분명 '탈세속화의 시대'(age of desecularization)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들의 정체성은 이중적이다. 즉, 한편으로는 세계화된 시장 경제에 맞게 보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종교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종교가 이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문제의 원인과 그 해결방안을 찾을 때 종교를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며, 공적인 영역에서 종교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심각한 잘못이다. 예를 들어 폭력과 평화의 문제를 보자. 미국의 9.11테러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현대의 폭력은 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경우가 많다. 토마스 프리드만(Thomas Friedmann)이 말하는 것처럼, 최첨단 정보기술로 세계가 평평해진 세계화 3.0(globalization 3.0) 시대를 맞아 시장은 점점 더 국제적이 되어가고 있지만 폭력은 더욱 국지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그 국지적인 폭력의 핵심에 바로 근본주의적인 방식으로 이해된 종교가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국지적인 폭력을 예방하고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어디에서 해결책을 구해야하는가? 물론 정치적인 방식의 해결이 필요하겠지만 현대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종교가 필수적이기에 종교에서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다. 즉, 폭력의 핵심에 종교가 있기에 그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힘 또한 종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탈세속화는 시대는 바로 종교의 시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복음을 사적인 것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공적인 영역에서 복음이 가진 사회비판적이고 사회개혁적인 목소리를 회복해야 한다. 복음으로 내면을 위로하는 것을 넘어 불의한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는 사회참여적인 목소리를 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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