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우티헤스논쟁은 그리스도론의 핵심문제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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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우티헤스논쟁은 그리스도론의 핵심문제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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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02.2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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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하 교수의 풀어쓰는 이야기 교회사 (29)

                 그리스도신앙논쟁역사: 네스토리우스논쟁, 에우티헤스논쟁

▲ 백석대 역사신학
실제적인 그리스도신앙논쟁은 안디옥의 장로 네스토리우스가 428년 시리아의 중심지인 안디옥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감독으로 오게 되면서 진행된다. 그가 오면서 데려온 집사 중 다혈질적이었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사람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영향을 받은 수도원이 있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알려진 키릴로스의 가르침 중에 마리아가 ‘하나님을 낳은 여인’이라는 주장이 있었고, 그는 이 가르침에 대하여 반발하였다.

그리고 그가 마리아는 ‘인간을 낳은 여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쪽 총대주교구를 대표하는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와 콘스탄티노플의 네스토리우스 사이의 논쟁으로 발전하였다.

네스토리우스는 중재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낳은 여인’으로 묘사할 것을 제안하게 된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에 정주하고 있던 이집트의 수도사들은 네스토리우스의 ‘불경’을 키릴로스에게 고발한다. 429년 부활절편지를 작성하면서 키릴로스는 이것을 ‘이단자’를 경고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리고 로마교회에 신학적인 판단을 의뢰하였다. 430년의 로마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파문으로 위협하였다. 뿐만 아니라 키릴로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12조항의 파문의 글로 네스토리우스를 위협하였다.

431년 테오도시우스 2세가 에베소에 제국의회를 소집하였을 때, 키릴로스는 주도권을 쥐고 자신과 함께한 대표단을 이끌고 도착하여 회의를 열어 네스토리우스를 안디옥의 ‘분리의 그리스도론’과 함께 정죄하였다. 나흘 뒤에 도착한 안디옥의 사람들과 네스토리우스가 역시 로마의 대표들 없이 회의를 열어 키릴로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일치의 그리스도론’을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기습적인 처리에 대하여 황제는 양쪽회의를 모두 정당한 회의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협상을 제안하여 양쪽 대표들의 대변자들을 선출하여 2년여 동안 논의하여 사실상 양성론을 위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고, 쌍방이 ‘그리스도론의 연합형태’를 얻어 ‘에베소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회의 결과로 유배되었던 키릴로스는 타협을 하여 일찍이 풀려나게 되었지만 네스토리우스는 상부 이집트지역의 유배에서 칼케돈회의(451) 직전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극단적으로 네스토리우스의 추종하는 자들에 의하여 ‘시리아-네스토리우스 교회’가 생겨났다.

네스토리우스논쟁(428/29-433)이 예수 그리스도에 중점을 두지 못하고 마리아의 신분에 대하여 주로 논의했던 것에 비하여 에우티헤스논쟁(448/9-451)은 그리스도론의 핵심문제를 다루었다. 이집트의 대 수도원장 이었던 에우티헤스가 콘스탄티노플에 논쟁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에우티헤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인정하지 않고 신성만을 주장하였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의 본성이 인간의 본성을 흡수했다는 논지를 폈다. 이러한 주장은 381년 아폴리나리오스가 주장한 것보다 더욱 명확하게 단성론적인 그리스도이해를 대표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프라비아누스(446-449)는 엔데무자를 통하여 에우티헤스를 정죄하였다. 그러나 에우티헤스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스코로스(444-451)에 의하여 지원을 받았다. 두 총대주교들은 모두 로마의 감독 레오 1세(440-461)에게 서신을 통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레오는 이와 같은 논쟁에 기꺼이 응했고 심판으로써 이 문제에대한 판정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레오가 프라비아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서방교회의 양성론과 ‘비하의 그리스도론’이 잘 나타난다. 물론 서방교회의 양성론에 따른 그리스도신앙이해는 이미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레오의 재촉으로 디오스코로스는 황실과의 좋은 관계 속에 에베소에서 449년 회의를 열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디오스코로스는 이집트 수도사들과 함께 상대정파들과 로마교회 대표들이 도착하기 전에 회의를 일방적으로 끝냈고, 레오는 ‘강도회의’라는 험담으로 이 회의의 부적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으로 결국 마르키아누스 황제의 허락을 받아 451년 가을에 칼케돈회의를 열어 그리스도신앙 이해에 대한 신앙고백을 완성하게 되었다. 칼케돈 신앙고백의 핵심내용은 “…하나님이심을 따라 아버지와 본질상 동일하시고 그리고 동시에 인간이심을 따라 우리와 본질상 동일하시고 … 하나의 인격과 그리고 한 실재(휘포스타시스)와 결합한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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