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상태바
환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 운영자
  • 승인 2012.02.08 12: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인찬 목사 (의왕중앙교회)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로서 1957년 사형에 반대한 에세이 '단두대에 관한 성찰'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알베르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널리 알려진 무신론자이다. 그는 신이 없는 근거의 하나로 “무고한 사람의 고난이 속속들이 널리 퍼져 있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자리는 없다”고 일갈하며, 신은 없다고 강변하였다.

까뮈는 억울하게 고난당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 신이 없는 증거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욥기는 까뮈가 제기하는 문제 그러니까 억울한 고난에 대한 부조리가 성행하고 승리하여 세상을 지배하는 현상에 대한 반론과 해답을 주는 말씀이다.

욥기를 일컬어 고난문학의 최고봉이라 한다. 서양문학사에서 고난 문학으로 3대 걸작을 꼽으라면 첫째는 구약성경의 욥기서요, 둘째는 단테의 신곡이요, 셋째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꼽는다. 욥기의 주제는 '의인(義人)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이다.

고난의 역경과 삶이 불행할 때 읽는 말씀이 욥기서이다. 욥기는 극심한 고난과 탄식 중에서 읽고 그 고난의 뜻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말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욥 36:15) 이 말씀은 고난은 우리를 깨우치고 교훈을 얻게 하는 교육과정이란 말씀이 아닌가. 고난과 고통은 하나님이 사람을 가르치시는 기회이며,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귀를 열어서 교훈을 듣게 하신다는 말씀이시니 그 고난의 의미를 바로 아는 신실한 사람이라면 이 얼마나 귀하신 하나님의 손길인가.

바람직스럽지 못한 우리 민족의 습성이 한두 가지 이겠는가마는 역사의 흐름 속에 꼭 고치고 갈 수만 있다만 대가를 치루라도 고쳤으면 하는 것이 한 가지가 있다. 그것은 민족적, 국가적, 공동체적 고난의 세월을 겪으면서 그 고난을 통한 교훈을 뼛속 깊이, 역사적으로 배우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처절한 민족상잔의 6.25를 겪으면서 그 6.25를 통해 역사적 교훈을 민족이 터득하기보다 빨리 잊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어, 교훈으로 삼기 위해 되씹고 되씹으며 되새김을 하여 같은 고난을 반복하지 말아야 할 것인데 힘들고 고단한 세월을 부끄러움으로 여기고 쉽게 잊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민들은 우리보다 더 극심한 고난의 역사를 겪어오면서 자신들이 겪은 고난 속에서 그들은 교훈을 얻고, 교훈삼아 고난의 역사를 영광의 역사로 승화시켜 나가는 민족의식이 부럽기만 하다. “부모대가 겪은 고난을 체득(體得)하지 못한 세대는 다시 그 고난을 되풀이 하게 된다.” 우리가 꼭 상기하고 새겨가져야 할 역사 속의 격언이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 계속되는 일련의 부끄러운 환란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손길이 아닌가 하고 은혜를 받는다. 성경적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바로 교정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훈련이 어디 있겠으며, 한국 교회를 농단하는 왜곡된 교권주의자들, 금권주의자들, 배금주의자들로 대변되는 이 혼란과 어리석은 자들의 작태가 한국 교회를 살리시고자 회개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이 아니겠는가.

문제는 우리민족의 역사를 통한 교훈을 학습하지 못하는 습성과 어설픈 자본주의적 힘의 논리가 확신범(確信犯)처럼 하나님의 섭리요 손길이이라고 믿고 어리석음을 회개하지 않는, 공멸로 가는 발람 같은 어리석음을 자행할까 하는 두려움이다.

오늘의 한기총의 현실을 보며 우리가 불의와 불법을 회개하고 말씀의 교과서를 따라 고난의 학교를 슬기롭게 통과하여 우리 한국교회의 앞으로 100년을 굳건히 세우는 선한 기회가 되기를 사모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