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1년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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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1년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요”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07.21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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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기업 강사로 인기몰이하고 있는 중도실명자 임 임 택 장로

1년, 365일 동안 내로라하는 기업을 다니며 무려 300여 회의 강의를 하고 있는 인기 강사 임임택 장로(삼호침례교회). 큰 아들은 토목학 박사, 둘째 아들은 목사, 거기에 그의 손과 발이 되어 주는 내조의 여왕 아내까지.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성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사실 그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무거운 짐 하나를 평생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
 

베체트 병. 이름도 생소한 병에 걸린 그는 원인도 치료법도 없어 평생을 아픔과 고통 속에 살아야 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한 쪽 눈을, 스물 한 살 되던 해에 나머지 한 쪽 눈마저 잃어 중도실명자가 됐지만, 그는 ‘무려 21년’을 볼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고백했다.
 

“태어난지 100일이 됐을 때쯤 어머니가 제 시선이 이상하다 느끼시고 병원에 데려 가셨는데, 어느 병원을 가도 희망이 보이지 않으셨대요. 심지어 장님이 다 된 아기를 이제야 데려왔다고 도리어 어머니를 혼내시는 의사도 있었대요.”
 

그때부터 꼬박 9년, 고통의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임 장로의 어머니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좋다는 약이며, 실력 있는 의사를 찾아 나섰다. 오전에는 일반병원으로 오후에는 한의원으로 어린 그를 안고 한 가닥 희망을 품은 채 다녔던 것이다.
 

“제가 태어난 해는 한국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던 52년 겨울이었죠. 온 나라의 삶이 궁핍했고, 처참했지요.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돈 걱정, 먹는 것 걱정 없는 집에서 태어나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원에 갈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에요.”
 

한의원에 가면 어른 손가락 크기만한 장대 침 30대를 그 작은 머리에 꽂아야 하는 공포에 하루도 마음 편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임 장로는 그때의 치료가 있었기에 스물한 해라는 시간 동안 희미한 시력이나마 유지할 수 있었음을 감사했다.
 

임 장로는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섯 살 어린 나이에 0.1이라는 약시 판정을 받았다. 비록 시력은 미약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남다른 두 가지를 주셨다. 음악적 재능과 아이큐 147이라는 좋은 머리를 주신 것이다. 그의 나이 여섯 살에 이미 구구단을 외우고, 2학년 때는 누나의 분수 숙제를 해 줄 정도였다. 부지런하고 공부 잘 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그는 치료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형편이 어려워져 영등포 공동묘지가 있는 마을로 이사를 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인 부산에서 줄곧 1등을 도맡아했던 그는 금세 서울아이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치료는 중단됐고 밀가루 한 포로 일곱 식구가 견뎌야 하는 어려운 때였기 때문에 영양이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어머니가 학교도 가지 못하게 하셨지요. 눈을 너무 혹사시키면 한쪽 눈마저 보지 못하게 될까봐 걱정이 되신 거예요. 그런데 저는 어린 마음에 ‘1등’을 뺏길지도 모른다는 걱정뿐이었지요.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때라 한 문제 실수하면 1등을 뺏길 수 있는 치열한 때였거든요. 저의 영원한 라이벌 영철이, 창섭이가 떠올라서 어머니께 1등은 어떡하냐고 소리쳤지요.”
 

결국 어머니는 임 장로를 학교에 보내줬다. 대신 그의 책가방 안에는 연필도, 노트도 없이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아이들에게 질 수는 없었다. 그의 목표는 경기중학교. 청소당번을 자처해 교실바닥에서 찾아낸 몽당연필과 찢어진 노트를 가지고 공부했다.
 

하지만, 이번엔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쳤다. 실력은 충분했지만, 경기중학교에 입학하면 더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그러면, 그때는 진짜 시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자식사랑이었다. 결국 집에서 가장 가까운 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다.
 

그리고 굴곡 많은 자신의 삶을 지탱 시켜준 ‘기타’와의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우연히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보게 된 전축. 거기서 흘러나오던 클리프 리차드의 ‘더 영원스(The young Ones)’. 그를 사로잡은 것은 노래 앞부분에 나오던 일렉트릭 기타 소리였다. 그 날 이후 계속해서 그의 머릿속을 맴돌던 기타 소리. 중학교에 입학하고 5일이 지난 날 공동묘지를 힘겹게 올라가는 리어카를 밀어주다가 가득 실린 짐 한켠에서 ‘기타’를 발견했다. 마침 임 장로 방 바로 옆으로 이사 온 기타 아저씨. 며칠동안의 설득 끝에 아저씨에게 기타를 배울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타가 제 몸짓보다도 크다며 가르쳐주시기를 거절하셨는데, 매일 찾아와 조르는 저의 눈빛을 보고 결국 설득 당하셨죠.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누군가를 가르칠 정도의 실력이 못 됐어요.”
 

아저씨에게서 도, 레, 미, 솔 기타 치는 기본을 배웠다. 기타를 배우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 밤새 연습장에 기타를 그려 음계를 외웠고, 혼자서 ‘고향의 봄’을 연습했다. 밤을 세워가며 무려 20쪽, 연습장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이어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대학생 형에게 기타를 배우기 위해 어린 나이에 새벽 5시만 되면 공동묘지를 넘기도 했다. 오로지 기타를 배우겠다는 목적을 위해 두려움조차 극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더 훌륭한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 기타교습소 문을 두드리게 됐다. 종로예술음악학원. 자신보다 훨씬 큰 형들 틈에서 뒤늦게 시작했지만, 그의 열정과 실력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었다. 빈 병을 모아 엿을 바꿔먹던 시절, 엿 대신 돈으로 바꿔 꼬박 6개월을 모아 기타교습소 수강료를 충당했다. 그리고 전국기타대회에 출전하게 됐다.
 

“형들보다 더 잘 하기 위해 이를 악 물고 연습했지만,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혹독한 훈련이었죠. 하루에 세 번이나 화장실에 가서 울기도 했지요. 그래도 꿈이 있었기에 멈출 수 없었어요. 대회 120여 일 앞두고 손끝에 맺힌 굳은살에서 피가 날 정도로 곡을 연습했죠. 그런데 20일 앞두고 피 멍 든 손으로 기타 줄이 쏙 들어오더라구요.”
 

일반 성인도 참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상처보다 기타 연습이 걱정이었다. 결국 약국에 가서 간단한 치료를 받고, 붕대 대신 유리 테이프를 붙이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연습했다. 결과는 전국 117명의 출전자 중 2등.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세계적인 기타리스트를 꿈꾸기 시작했다.
 

“앞으로 10년만 연습하면 정말 세계적인 기타리스트가 될 것 같았어요. 그때는 미군부대에서 공연하는게 최고의 실력자로 인정받는 길이었는데, 마침 공연 요청을 받았죠. 열여덟살 가을이었는데, 한 스테이지 공연이 40분인데 앵콜을 4곡이나 받아서 53분간 연주했죠.”
 

그 후 3년간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최연소 기타리스트, 최고의 기타리스트라는 찬사를 받으며 무대를 누볐다. 드디어 해외공연무대에 설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의 나이 스물 한 살. 그런데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남은 한 쪽 눈마저 실명. 결국 해외무대의 꿈은 좌절됐고, 그와 함께 삶의 좌절도 경험해야만 했다.
 

“1년여를 실의에 빠져 지냈죠. 하지만, 실명을 인정하고 나니 다시 삶에 대한, 기타에 대한 열정이 살아났어요. 실명 후 기타를 다시 쳐봤지만 연주할 수 있는 곡이 몇 곡 없었어요.”
 

점자악보를 배웠다. 3개월은 배워야 하는데, 손에 진물이 날 정도로 연습하며 18일만에 모두 터득해냈다. 그리고 연주곡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제 연습소식을 듣고 후배들이 함께 공연하자고 연락이 왔어요. 무대에 설 수 있다는 그 가슴 벅찬 감동은 저에게 쉼을 허락하지 않았죠. 6개월 동안 120곡을 외웠으니까요.”
 

그렇게 8년을 그들과 함께 공연했다. 비록 눈은 안 보였지만, 그 기간 동안 아내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아이들과 아내를 품에 안으셨고, 그 아내를 통해 그를 교회로 인도하셨다. 새벽기도회에 피아노 반주자로 세우셨고, IMF를 예비해 피아노 조율도 배우게 하셨다. 또한, 그가 출석하던 교회 한 장로님을 통해 그를 기업 강사의 길로 인도하셨다.
 

강의 때마다 프로의 세계, 프로의 정신을 가르치는 임 장로. 삶에서는 물론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프로의 정신을 갖고 예배 드리고, 기도생활을 한다는 그는 매일의 삶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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