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삶의 목적은 찬양사역이 아닌 예수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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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삶의 목적은 찬양사역이 아닌 예수님입니다”
  • 현승미 기자
  • 승인 2010.07.12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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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상처 극복하고 ‘사랑’과 ‘감사’의 전도자 된 김 광 현 전도사

태어날 때부터 ‘엄마는 부재중’이었다. 집 안에 엄마 물건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고, 아빠 역시 엄마에 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다. 김광현 전도사는 스스로 판단 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쯤부터 그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겠지’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머니의 품. 그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과 갈급함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아버지는 ‘새 엄마’를 안겨줬다. 그런데, 말 그대로 동화 속에 등장하는 ‘계모’이였다.
 

“유치원 때 저에게 설거지를 시켰는데, 제가 실수로 유리컵을 깼어요. 한참동안을 혼내시더니 갑자기 저에게 헤드셋을 끼워주고 전축 앞에 앉으라고 하더라고요.”
 

계모는 마치 한가롭고 평온한 시간, 음악을 듣고 있는 아들의 모습인 양 사진을 찍어댔다. 그리고 퇴근 후 집에 돌아 온 아버지에게 그 사진을 보여줬다. 어떤 계모는 자를 세워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이 아픔을 내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머리에 내려앉은 상처 딱지를 본 아버지에게 그냥 넘어졌다고 말했죠. 여러 명의 계모들이 거쳐 가면서 어머니에 대한 환상이 오히려 커졌습니다. 또, 마음 한켠에서는 그 만큼의 미움도 자라났죠.”
 

김 전도사 아버지의 직업은 문화영화나 CF를 주로 찍던 감독. 주로 출장이 잦아 집에 있는 시간보다 밖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계모들의 손에서 자라거나 남의 집에 맡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집에 있는 아들 걱정에 아버지는 그에게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집으로 올 것을 명했다.
 

아버지에게 순종 했지만, 그는 친구를 사귈 수도 없었다. 오직 TV만이 외로운 그에게 친구가 돼 줬다. 그 누구보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많았던 김광현 전도사.
 

“성장하면서 반항기가 와서 친구 집에서 잘 때가 많았어요. 집에 전화도 안 했죠. 아버지도 싫고, 어른들이 너무 싫었어요. 세상 모든 것이 보기 싫었죠. 심지어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한동안 태양만 보고 살기도 했어요.”
 

유치원 시절 삶에 대한 고민으로 옥상에서 뛰어내리기도 했던 그는 세상이 보기 싫어 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친구를 사귀고 싶어도 사회성이 없어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자꾸 관계가 틀어졌다. 결국 아버지의 제재가 없이도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우울하고 내성적인 그는 혼자 장롱 속이나 방 한 구석에서 틀어박혀 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키가 크다고 반장을 시켜주셨어요. 그때 한참 농구가 인기몰이를 할 때였는데, 선생님이 농구를 해보지 않겠냐고 추천해 주셨어요. 저한테 누군가가 관심 가져주니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아이들하고도 조금씩 좋은 관계를 갖기 시작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공부를 강요했다. 자신의 예능적 끼를 아들이 물려받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 농구는 물론 예능 쪽은 아예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점점 미움의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가출했던 형을 통해 엄마 소식을 알게 됐다. 갑자기 집에 온 형이 다짜고짜 그를 데려간 곳은 한 허름한 동네. 돌아가신줄로만 알았던 엄마가 버젓이 살아있었다. 더욱이 김 전도사의 상상 속 엄마의 모습이 아니었다. 담배를 피며 고스톱을 치고 있던 엄마.
 

“그 모습을 본 뒤로 엄마에 대한 상처가 더 깊어졌어요. 고등학교 때 아이들과 춤 동아리도 만들고,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는 방향으로 빠져들었지요.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저를 붙잡아주셨어요.”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우연히 길을 걷다가 ‘고등부 동계 금식 수련회’ 현수막을 발견했다. 생전 처음 접하는 단어 ‘금식’. 그에게는 당시 유행하던 무술분야의 한 종목으로 다가왔다.
 

“집에 가기 싫었는데 마침 잘 됐다 싶었어요. 그곳에서 수련 좀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지하에 모두 방석을 깔아놓고 앉아있어서 처음에는 ‘단전호흡’ 중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처음 듣는 노래며, 이상한 기도소리를 듣게 됐지요.”
 

깜짝 놀라 일어서려는 그의 어깨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그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한테 관심을 받고, 사랑을 체험하게 됐다. 그 체험 후 결단하고 그는 일주일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밖에서 몰래 먹으면서 금식 아닌 금식을 했지요. 그들이 전하는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받았어요.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나를 위해서 기도해 줄때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졌는지 몰라요.”
 

그곳에서 김광현 전도사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고백하게 됐다. 이전에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폭포수 같이 부어주시는 사랑의 어머니였다. 그 후 하나님은 그의 삶 전체를 주관하셨다. 그가 가야할 길을 예비해주셨고, 옷이 필요할 땐 옷을, 등록금이 필요할 땐 등록금을 채워주셨다. 그의 아버지 역시 그를 통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고, 그 안에서 만난 새어머니와 좋은 가정을 꾸리게 됐다.
 

예능계를 염두에 두고 학교를 준비할 때조차 하나님은 꿈을 통해 그가 가야 할 학교를 일러 주셨다. 지금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비전은 찬양사역자. 하지만, 그에 앞서 신학을 공부하도록 하셨다. 영적 무장이 없이는 그 어떤 찬양도 은혜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김 전도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신학을 공부했고, 졸업 후 작은 교회에서 말씀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인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그를 들어쓰셔서 50대1의 경쟁률을 뚫고 큰 교회 사역을 맡겨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2008년 지금의 멘토가 돼 준 전용대 목사를 만나게 됐다. 복음성가 1세대로 많은 이들에게 은혜를 끼쳐온 전 목사는 한 복음성가대회에 출전한 그를 눈여겨봤다. 비록 예선에 떨어졌지만, 그의 영성과 찬양사역자로서의 비전을 보고 먼저 연락을 해 왔다. 교회 사역으로 김 전도사가 몇 차례나 약속을 어기는 가운데에서도 전용대 목사는 묵묵히 기다려줬다. 그리고 지난해 1월 1일 모든 사역을 내려놓고 전용대 목사를 만난 김 전도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찬양사역자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그해 6월 ‘Because of love’라는 감격의 첫 앨범이 나오게 됐다.
 

“제 삶의 목적은 찬양사역이 아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목적으로 두고 있을 때 하나님은 저에게 찬양의 도구를 허락하셨고, 그것을 통해 앨범까지 만들게 하셨지요.”
 

전문적인 음악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도 찬양뿐만 아니라 자신의 앨범 반 이상을 직접 작사, 작곡하기도 한 김광현 전도사. 그는 영동극동방송 ‘밤이 깊은 동산에서’ 진행자로, 태능선수촌 예배 찬양 인도자로 새 음반 준비로 활발한 사역을 펼치며, 하나님 사역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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