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주의 탈피 ‘변형의 능력’ 발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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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 탈피 ‘변형의 능력’ 발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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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12.29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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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신 명예교수<연세대>


한국 교회가 전래하는 좁다란 ‘가족주의’ 지향성과 오늘에 이르면서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된 물질 획득의 ‘경제주의’ 지향성을 돌파하지 않고서 새로운 앞날을 약속받겠다고 한다면, 참으로 천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교회는 세상의 잣대가 아닌 교회의 잣대를 가져야 하고, 그 잣대로 세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가족주의` 또는 `유사가족주의`와 경제주의가 맞장구치며 구조화시켜 놓은 우리 사회의 지배 가치와 이념, 그 밑에 무릎 꿇어온 지난날을 청산할 때가 온 것이다. 그 지배의 틀을 벗어나 그것을 넘어설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 교회는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일은 참으로 만만찮다. 이 두 지향성이 우리 사회에 단단히 진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교회로 서있기 위해서는 그 구조를 돌파하여 교회의 본질을 되찾아 그것을 지켜가야 한다. ‘교회는 교회이다.’ 교회는 좁다란 자기 이익과 물량의 계산에 집착하는 다른 조직체와 성격을 달리한다. 기업체나 관공서와 같은 다른 목적과 존재 이유를 가진 조직체를 흉내낼 것이 아니다.


교회는 기존하는 사회의 흐름에 동조하여 그것을 옹호하며 유착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비판의 거리’를 둘 수 있어야 한다. 교회와 다른 사회 영역이 유착할 때 교회는 그 특유의 ‘변형 능력’을 잃고 현상 유지의 타성에 빠져 타락의 길로 떨어진다. 개신교 정신은 국가와의 유착도 거부할 뿐더러 특정 정파나 특정 세력과 뒤범벅이 되는 유착과 용해의 자리에 결코 들지 않는다. 교회는 이 모든 것에서 ‘초월’하여 이 모든 것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자리’를 지키고자 한다. 그것이 개신교 전통의 생동력이고 활력소이다.


우리의 역사에서도 그러하였다. 우선 좁다란 친분 중심의 관계가 아무리 오래되고 아무리 뿌리가 깊다 하더라도, 아니 그것이 아무리 우리의 미풍양속에 속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긴장을 자아내어야 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상전, 여자와 남자가 하나라는 말씀의 위력을 실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말씀은 사회 변형의 능력을 제공해 주는 힘이었기에, 그 힘에 의지하여 교회는 조선 시대의 습속을 도전하고 재구성하고자 했다. 바로 그러한 변형의 능력을 오늘의 교회가 상실해버린 것이다. 나아가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한말 조선 사회에서도 물질의 부를 내세우기보다는 그 너머, 그것보다 더욱 깊고 더욱 높은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을 널리 펼치는데 더욱 큰 관심을 쏟아야 했다. 사회 약자들에게 다가갔고 억눌린 자들을 보살피는 새로운 삶의 유형을 만들어 왔다. 한 세기 전 역사를 새롭게 일군 한국의 교회가 이 땅에서 보여준 하나님의 증인됨이 그렇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변형의 능력도 오늘의 교회는 잃어버리고 말았다.


전래하는 좁은 가족주의의 뿌리를 도려내지 못했기에 우리의 의식 세계도 좁다란 관심 세계에 묶여 있게 되었으며, 꽉 막힌 개교회주의와 답답한 교파주의의 굳은 담벼락 안에 갇혀 있게 되었다. 우리 사회를 온통 휘몰아가고 있는 경제주의에 모두가 굴복했기에 우리의 삶이 물량의 힘에 휘둘리게 되었으며, 교회와 목회의 본질조차 물량화의 맥락에서 뒤틀리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우리 사회를 괴롭히고 우리의 삶을 왜곡시키고 있는 좁다란 친분주의의 울타리를 걷어치우는 일에 앞장서야 하며, ‘변형의 능력’을 발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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