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와 사회봉사로 이웃과 함께 호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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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와 사회봉사로 이웃과 함께 호흡합니다”
  • 송영락
  • 승인 2006.02.16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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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입고 덜 쓰고 나눈 사회봉사로 성장한 ‘도봉감리교회’

  

 
도봉동노인복지센터·창동종합사회복지관 운영하여 지역사회 섬기는 교회 우뚝


전도와 사회봉사라는 두 축으로 성장한 도봉감리교회.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지 38년만에 등록교인 3000명으로 성장했다.


개척초기부터 지켜온 전도와 사회봉사는 세대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고 계속됐다. 올해도 여전히 도봉감리교회는 전도하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 그리고 정직한 교회가 되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었다. 

1968년 봄, 가난한 도봉산 기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다. 조마리아권사 집에서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모여 예배드리기 시작하면서 도봉감리교회는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편안한 안식을 제공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처럼 22평의 부로크 건물로 첫 번째 교회를 건축하여 예배를 드린 도봉감리교회는 30년만에 도봉구, 강북구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로 성장했다.

 

2002년 김진호감독회장과 2004년 신경하감독회장을 배출하기까지 도봉감리교회는 교회건축과 함께 부흥에 부흥을 거듭했다. 빛바랜 흑백 사진에 남아있는 첫 여름 성경학교 모습은 부흥의 원동력을 짐작케 했다. 진지하게 가르치는 교사와 열중하여 듣는 어린이들은 어두운 시대의 환경에 굴하지 않는 교회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김진호, 신경하 감독회장을 배출한 전통의 교회로 강북 복음화에 앞장


하나님은 모이기를 힘쓰는 도봉감리교회에 물질의 축복과 함께 부흥을 쏟아부어주었다. 젊은이들이 교회에 모이기 시작했고 장년들의 무릎꿇은 기도와 눈물은 딱딱한 시멘트 교회바닥을 적셨다. 자라나는 도봉감리교회에 신경하목사가 2대 교역자로 부임하면서 걸음마를 걷는 아동기 어린 성도들과 함께 100평의 교회와 20평의 목사관을 마련했다. 성도들은 먹고살기 힘든 바쁜 일상생활을 접어두고 교회를 건축하는 데 한마음으로 참여했다. 주일학교의 어린아이들부터 청년, 여성도, 장년에 이르기까지 하나가 되었다.


점차 교회는 안정적으로 부흥하면서 나누는 교회로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창립 10주년을 맞아 지역 어르신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어 주면서 섬기는 교회, 봉사하는 교회의 모습을 점차 갖춰 나갔다. 특히 전방군부대 위문공연, 맹인복지관 위로방문 등 교회의 역량을 소외되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데 사용했다.


이렇게 큰 꿈을 가지고 성장하는 소년기에 홍기만목사가 3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든든한 터전을 마련했다. 220평의 세 번째 교회를 건축하고 사춘기를 맞는 소년기의 양무리들을 가르치고 양육했다. 교회를 건축할 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과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와 피와 땀의 결실이 나타났다. 특히 제1회 전교인 체육대회와 베델성서대학을 통해 나누고 배움이 있는 교회로 성장했다.

1990년 제5대 교역자로 부임한 김진호목사는 든든하게 다져진 터 위에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500여명의 교회를 등록성도 3000여명으로 부흥시킨 것. 김진호목사의 부흥의 원동력은 전도와 사회봉사였다.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김목사의 목회철학이었다.


초대 조신환목사부터 4대 김종훈목사까지 5~6년의 사역기간만을 채우고 떠났지만 김진호목사는 현재까지 16년 동안 도봉감리교회를 지키고 있다. 2002년 서울연회 감독과 감독회장으로 선출되면서 김목사의 목회철학은 더욱 빛을 발했다.

감리교 감독이 되기 위해서는 재수는 필수고 삼수는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 것이 흐름이었는데, 김목사는 출마하자마자 단번에 감독회장까지 되는 보기 드문 선례를 남겼다. 그만큼 김목사는 보이는 부분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더 크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예라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김목사는 영성이 강한 목회자다. 이러한 영성은 그가 살아온 날을 더듬어 보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늘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림을 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빈 몸으로 고학을 하면서 공부를 했습니다. 제가 삼일학교를 다니고 또 신학을 다 마치기까지 돕는 손길이 없었다면 스스로 미래를 준비해 나갈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3백만총력전도운동, 사회봉사운동, 정직운동을 전개하도록 한 신앙적 결단이 되었다.

 

“3백만총력전도운동은 단순히 교인을 채우자는 운동이 아닌 민족을 살리고 사회를 정화하는 운동이었습니다. 감리교회를 새롭게 하는 가장 실천적인 개혁운동입니다. 전도운동은 교회의 시대적 소명과 따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운동을 위해서 교회가 선한 이웃이 되어 사회봉사에 앞장서야 합니다. 잃어 가고 있는 사회복지분야에 눈을 돌려 소외된 자들에게 진정한 이웃과 친구가 되는 교회가 될 때 교회의 존재이유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봉사와 전도는 하나다. 이 때문에 매주 1500여명이 출석하는 대형교회인데도 도봉감리교회는 변변한 대형버스 하나 없다. 버스를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지난 10일에는 창동종합사회복지관 3층 강당에서 교인과 공무원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복지관 운영 감사예배’를 드렸다. 2005년에는 도봉동 노인복지센터를 운영한데 이어 두 번째로 복지센테를 운영하게 된 것.

 

“우리의 주변에는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불우이웃 등 소외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참된 이웃이 돼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도봉동노인복지센터와 창동종합사회복지관을 통해 참된 이웃의 역할을 감당할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배운 신앙은 흔들림이 없다. 가난하고 배고픈 신학생 시절을 보낸 김목사는 후배들을 위한 배려라면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다. 개척교회 설립을 위해 매월 500만원을 저축할 정도로 후배사랑이 각별하다. 김목사는 89년 이후 5년마다 한 교회씩 개척하는 좋은 전통을 세워가고 있다.

 

첫 번째 결실로 대지 200평에 성민교회(이정민목사)를 건축하고 7년 동안 부교역자로 사역한 후배목사를 파송했다. 2003년에는 두 번째로 은평구 응암동에 성지교회(최우성목사)를 개척, 6년 동안 부교역자로 사역한 후배목사를 조건없이 파송했다.

 

“많은 신학생들이 일자리가 없는 상황입니다. 할 수 있는 교회들은 교회를 건축해야 합니다. 후배들이 기도와 눈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야 합니다.”

 

좀 덜 쓰고 덜 입고 모은 헌금으로 이웃사랑과 교회개척에 사용하고 있는 도봉감리교회. 2년 전부터는 ‘성미’를 없애고 ‘사랑의 쌀’로 바꿔,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또 최근에는 주5일근무제를 맞아 ‘토요일은 봉사하는 날’로 정했다. 전교인이 봉사대원이 되어 교회 주변뿐만 아니라 동네 구석구석을 청소하기 위해서다. 이웃사랑을 위해 다양한 아이디어를 실천하는 도봉감리교회.

 

그러나 김목사는 늘 걱정이 많다. 자꾸만 교회학교가 어려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정삼각형에서 역삼각형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PC방, 오락실, 만화가게에 청소년들을 빼앗기면 안됩니다. 상당한 투자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전문성을 갖춘 교역자를 양성해야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 청년에 전문성을 갖춘 목회자를 양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미래교회연구원 이사장, 교정선교회 회장 등을 맡아 특수선교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김목사는 교회가 정직하고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데 앞장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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