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에 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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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에 답하라!
  • 이의용 교수(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 승인 2023.06.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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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용의 감사행전 (46)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농촌의 가장 큰 재산은 소(牛)다. 소는 달구지에 실은 물건을 운반해주고, 멍에를 메고 논과 밭의 흙을 갈아준다. 죽어서는 제 몸마저 사람에게 제공한다. 기계식 농기구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가 없이는 농사를 짓고 살 수가 없었다. 그러한 시절에도 자식의 공부를 위해 소를 팔아 자식을 서울로 유학을 보냈으니, 교육에 대한 우리의 열의는 가히 세계적이라 하겠다. 

우리는 돈을 가장 가치있게 쓰는 방법이 장학금 기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평생 고생하며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는다. 교회에도 장학제도가 있다. 교인들의 기부금 등으로 장학금을 마련하여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소년들을 돕고 있다. 그런데 간혹 장학금을 전달하는 장면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여러 교인들 앞에 학생을 나오게 해서 장학금 봉투를 전달하는 모습이다. 마치 “이 학생은 가난한 학생이다”라고 광고를 하는 것 같다. 그때 봉투를 받는 학생의 심정은 어떨지…

모두가 가난했던 때에는 불우이웃돕기 뉴스가 신문이나 방송에 자주 나왔다. 그때마다 라면 같은 물품을 쌓아놓고 그걸 배경으로 전달식을 하는 사진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누군가 “가난한 것은 창피한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런 걸 받는 사람들은 퍽 불편했을 것 같다. 많은 교인들 앞에서 장학금을 받는 청소년의 마음처럼.

교회에서 장학위원장을 할 때 장학금을 ‘거저 주는 것’이 아니라 ‘빌려주는 것’으로, ‘거저 받는 것’이 아니라 ‘빌리는 것’으로 인식을 바꿔주고 싶었다. 그래서 영수증의 아래에 이런 문안을 넣고 서명을 하도록 했다. “교회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감사합니다.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 교회로부터 받은 장학금 만큼 훗날 누군가에게  꼭 갚겠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불러서 격려하고 기도해주는 걸로 전달식을 대신했다. 돈보다 다른 사람에게 베풀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교육이 아닐까? 학교도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사람이 받는 데 익숙해지면, 받는 게 ‘권리’가 되기 쉽다. 어린아이는 받는 데 익숙하다.  뭐든지 제(I) 입으로 먼저 넣는다. 조금 크면 먹을 걸 엄마 입에도 넣어준다. 그리고 다른 사람(you) 입에도 넣어준다. 더 크면 우리(we)라는 공동체 입을 염려하게 된다. 받는 사람(taker)에서 주는 사람(giver)으로 바뀌는 것이 바로 ‘성숙’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교회를 염려하는 이들이 있지만,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처럼 새벽기도회도 모이지 않고 자주 모이지는 않지만, 그들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유를 이웃과 나누는 삶을 일상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 사회는 개인들의 기부활동이 나라 경제에 큰 몫을 한다. 우리처럼 자식에게 물려주기보다는 열심히 벌어서 대부분 사회에 기부한다.

주님께서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지만 우리의 신앙이 지나치게 ‘받는 것’에 치중돼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면 좋겠다. 과연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와 이웃에게 무엇을 얼마나 베풀고 있는지, 우리 교인들은 이웃들에게 무엇을 얼마나 베풀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르며 이웃을 섬기자!

요즘 이런 말이 유행한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나랑 가까운 사람이 교회에 다닌다.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우리 동네에 교회가 있고, 교인이 있다는 것이 우리 이웃들에게 ‘무슨 상관’이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교회와 교인이 설 자리가 점점 더 좁아진다. 최근 기독교에 대한 호감도나 신뢰도가 한 자리 수로 추락했다. 이타주의(利他主義)인 기독교가 이기주의(利己主義)로 변질된 데 대한 실망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된 데에는 교인들의 삶을 성숙시키보다는 교회의 규모 성장에 치중해온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 교회 안에서 중심을 놓친 장로들과 지성인들의 책임도 크다.

인구가 줄어들고, 종교인구 비율도 낮아지고, 교인 수도 줄어드니 교회마다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위기 극복의 열쇠는 ‘본질’에 충실해지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교회와 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이타주의에 충실해야 한다. 모여서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만 부르며 뭔가를 달라고 부르짖지만 말고,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부르며 어떻게 이웃을 섬기며 베풀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가 나랑 무슨 상관인데?”라는 비신자들의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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