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통에 더욱 뜨거워진 예배…한국교회 부흥의 씨앗
믿음의 자손들 한국전쟁 수난사 기억해야
전쟁 중에 피어난 한국교회 섬김과 부흥
68년의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북한 공산군으로부터 온갖 박해를 당했던 기독교인들에게도 한국전쟁은 씻을 수 없는 아픔이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국난극복을 위해 기도와 구제에 힘썼던 교회의 모습을 떠올리는 이는 생각보다 드물다. 이에 '한국전쟁 속 교회의 역할' 기획 그 첫 번째로 오늘날 한국교회 부흥의 씨앗을 싹틔운 당시 피란민들의 간절한 예배 풍경을 살펴본다.
생명과 맞바꾼 주일성수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년1개월간 자행된 이념적 살육으로 사망자는 400만명에 이르렀고 한반도는 초토화됐다. 특히 북한 공산군은 남한의 기독교인을 군과 경찰과 더불어 친미성향의 반공세력으로 보고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가는 곳마다 교회건물과 미션스쿨을 폭격과 화재로 파괴했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목에 돌을 매달아 바닷가에 수장시키는 등의 끔찍한 방법으로 수많은 목회자와 평신도를 학살했다. 오늘날 정확한 통계는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 남한개신교 순교자의 70% 이상이 이때 나온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공산군의 끔찍한 만행에도 피란길을 거부하고 순교 직전까지 자기희생과 굳은 신앙을 보여준 이들의 모습은 되새길 필요가 있다. 우선 나병환자들을 돌보다 북한군에 총살된 손양원 목사의 일화는 유명하다. 반면 비교적 덜 알려진 순교자들도 많다. 주일에 시키는 노동을 거부하고 예배를 지키려다 총살된 박기천 전도사나 배추달 집사 등이 그 예다. 고신대 이상규 명예교수는 "아직도 미처 파악되지 못한 순교자들이 많다"면서 "시간이 지나 증언해줄 인물과 자료가 사라지거나 후손이 관심을 갖지 않아 점점 잊히는 게 안타깝다"고 말했다
"울지 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다"
기독교인을 개별적으로 체포해 처형하거나 북으로 납치하던 공산당은 급기야 수십 명씩 집단학살을 저지르기도 했다. 전체 교인의 3분의2가량인 77명이 집단학살을 당한 전남 영광의 염산교회가 대표적이다. 6.25 전쟁이 터지고 공산군이 교회를 점거하자 3대 교역자였던 김방호 목사는 성도들의 가정을 전전하며 비밀 예배를 드렸다. 하지만 1950년 9월28일 서울이 수복되던 날, 미처 북으로 도망치지 못한 공산군 잔당은 이 사실을 알고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김방호 목사를 비롯해 어린아이와 노인, 일가족 등 교인들을 몰살한 것.
"울지 마라. 우리는 곧 천국에 간단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차별 죽임을 당해야 했던 교인들은 그럼에도 생의 끝자락에서 서로를 이렇게 달랬다. 이들은 심지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라며 공산군을 용서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찬송을 불렀다. 1951년 극적으로 생존한 김방호 목사의 둘째 아들 김익 전도사는 염산교회 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성도들부터 집단학살에 가담했던 좌익 인사들까지 일일이 찾아다니며 위로와 용서의 말씀을 전했다. 이 때문에 염산교회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품는 '사랑의 교회'로 불렸다.
집단학살의 비극은 염산교회뿐만이 아닌 호남지역 대부분 교회들에서 일어났다. 원당교회(73명)·봉남교회(73명)·영암읍교회(24명)·야월리교회(65명)·덕암교회(22명) 등에서 똑같은 참극이 벌어졌다. 그 이유에 대해 호남신대 차종순 교수는 "국군과 UN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후퇴로가 차단돼 산중에 은거하던 공산군이 치안이 허술한 틈을 타 마을로 내려와 보복성 만행을 저지른 것"이라며 "도주할 길이 가로막히자 적개심과 화풀이가 한층 거세진 이들은 교인을 납치하기보다 집단 처형했다"고 설명했다.
피란민 교회, 전쟁 당일도 예배
한편 6.25전쟁 동안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는 '피란민 교회'들이 우후죽순 세워졌다. 유독 이곳에 설립 68주년을 전후로 한 교회들이 많은 이유다. 당시 부산에 정착한 다수의 월남인과 피란민은 새롭게 교회를 설립했다. 서울 영락교회의 경우 1945년 해방 후 공상정권의 박해를 피해 북에서 내려온 한경직 목사와 27명의 기독교인이 서울에 세운 베다니전도교회가 시초다. 부산 영락교회는 6.25전쟁이 나자 이들이 피란지인 부산에 세운 교회다.
흥미로운 점은 전쟁이 터진 당일에도 여느 때와 같이 예배를 드렸다는 것이다. 2013년 영락교회가 공개한 사료에 따르면 한경직 목사는 이날 오전 11시30분 부산영락교회 본당에서 '지성의 도'를 주제로 설교했다. '영락교회 35년사'에는 그때의 예배 분위기가 잘 소개돼 있다. "북괴군의 남침 보도를 들어서 불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으나 예배를 드리기 위해 4천명의 교우들이 예정대로 모였다. 이날은 건축액 부족액 1천만환을 헌금하기로 한 날이었다. 헌금한 결과 목표액을 훨씬 넘는 1천200만환이 헌금되었다."
이 밖에도 월남인들은 북한에 두고 온 교회를 부산에 재건하기도 했다. 순교자 주기철 목사를 낳은 산정현교회는 1951년 10월 부산 동광동에서 천막교회로 다시 시작됐다. 대청교회·대성교회·부산서교회도 효시는 북한이다. 부산장신대 탁지일 교수는 "고난을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려는 성도들을 비롯해 생명부지의 몸으로 보따리만 안은 채 사선을 넘은 이들에게 예배당은 안전한 피난처였다. 이곳에서 고향 사람들을 만나 아픔을 나누고 당장의 막막한 삶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다"고 피란민 교회의 의미를 전했다.
뿐만 아니라 작사가 석진영은 1952년 피란민들의 고난을 목도하면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는 찬송을 짓기도 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 만백성을 사랑하사 오래 참고 기다리네. 인애하신 우리 구주 의의 심판 하시는 날 곧 가까이 임하는데 믿는 자여 어이할꼬"라는 가사에는 애통한 마음과 함께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강렬한 외침이 담겼다.
시련에도 기도로 깨운 새벽
그런가 하면 포로수용소 안에는 자그마한 예배처소도 마련됐다. 한국전쟁 동안 남한에는 약 13만명의 포로가 부산·거제도·광주·마산·영천·인천 등지에 수용됐다. 그러나 북으로의 송환을 요구하는 세력과 자유의지에 따라 남한에 남겠다는 반공포로 간 다툼이 치열했고 급기야 인민재판 및 살인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와 한국인 교역자를 중심으로 포로선교가 전개됐는데 '반공포로의 아버지'로 불린 옥호열(Voekel) 선교사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천막교회에서는 집회와 새벽기도가 열렸고 한글·영어 등을 가르치는 성경학교가 개설되기도 했다.
서울신대 박명수 교수는 "암울했던 시기 새벽을 밝힌 그들의 열정적인 기도는 지금의 한국교회를 있게 한 영적 에너지로 작용했다"면서 "이때 신앙교육을 받은 포로들 상당수는 훗날 석방돼 기독교인이 됐고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으로 거듭났다"고 밝혔다. 실제로 2015년 '한국 교회와 6·25 전쟁사' 책을 펴낸 반공포로 출신 김창식 목사는 "먹을 것이 없어 변도 보지 못했던 시절 성경은 영혼의 허기짐을 채워준 책"이라며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던 수용소 생활을 회고하기도 했다. 믿음의 후손된 우리들이 한국전쟁 수난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