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테스탄트교회로 인한 사회변혁과 교회의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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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교회로 인한 사회변혁과 교회의 제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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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4.09.03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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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남존여비사상 극복·일부일처제 시행·과부 재혼 허용 역설
▲ 조병하 교수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전래되면서 한국사회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선교사들은 많은 사회생활에서 변혁을 가져와야할 것을 발견하였다. 게일은 “농부의 집은 청결하면 못쓴다.”라는 말로 표현되는 생활을 공리공담이라 비판하고, 금광채굴권을 타국 사람이 취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보화를 직접 캐어 사용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선교사들은 복음이 전래를 통하여 일하기 싫어하는 것을 극복하도록 하였고, 술과 담배, 아편을 금지하는 것이 애국이라고 강조하였다.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인 미신을 타파하였다. 당시 농민들의 수입이 연 30$ 정도였는데, 무당은 월 75$이었다고 한다. ‘아는 자’의 의미를 지닌 샤먼의 행위들을 비판하였고, 산당과 성황당을 불태웠다. 선교사들은 역시 불교의 미신적인 면도 비판한다. 이삿날과 혼인날을 택일하는 도교의 풍수지리설 등도 비판하였다. 조혼의 악습과 축첩문제, 혼인 상대를 부모가 정해 주는 일, 혼인을 위해 돈을 주고받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고, 제사를 폐지하였다.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들어왔던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근대화를 위하여서도 큰 공헌들을 하였다.

서재필은 1897년 12월 31일 정동교회에서 연설토론회를 열어 남녀평등을 역설하여 여성들이 교육을 받도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사나이는 기와집 같다고 하고 여편네는 초가집 갖다하여 분별하니 극히 개탄할 일”이라고 비판하였다. 남존여비사상을 극복하고, 일부일처제를 시행할 것과 과부들의 재혼의 허용 등을 역설하였다.

이 시기에 신문의 발행은 개화를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하게 하였다. 조선그리스도인 회보(1897.2.2.), 그리스도신문(1897.4.1.), 협성회보(1898.1.1.)를 발간하여 선교와 계몽에 활용하였다.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언문이라고 비하하여 일컬었으며, 아이들과 여자들의 언어라고 가볍게 여겼던 한글을 성경번역을 위한 언어로 택함으로써 한글의 활용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존 로스 선교사는 중국에 있을 때 한글문법을 간행하였고, 천주교에서는 18세기 말 한글 교리서를 간행하였다. 1893년 1월 장로회 공회회의에서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만 기록한다.”라고 결의하는 한글 전용정책을 세웠다. 1904년에는 한글연구소를 세우기도 하였다. 성경보급은 한글의 대중화에 공헌함으로써 문맹을 퇴치하고 개화를 촉진하였다. 한글을 읽고 내용을 설명할 수 있어야 세례를 베푸는 교회가 많았다.

선교의 진전과 더불어 교회는 제도화되어갔다. 천주교에서는 1832년 신학생을 선발하였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1901년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시작하였다. 이 때 장대현교회 장로 두 사람이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02년에 4명이 더 입학하여 6명이 되었다. 수업기간은 3개월 공부 9개월 교회사역을 하면서 독자적으로 학습하여 5년의 기간을 공부하도록 장로회공의회가 승인하였다. 1905년 평양연합신학교로 정식교육을 시작하여 1906년에는 40명이 재학하였다. 교과목은 성서신학(신구약), 실천신학, 교회사, 교양과목이었다. 1907년 장로교가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할 때에, 감리교는 협성신학교를 설립하였다. 성결교는 1911년에 서울(경성)신학교를 세웠다.

한국 교회를 위하여 교회의 직분들도 세워졌다. 권서인이 있었다. 그들은 권서를 통하여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하였다. 집사는 처음에 서리집사만 있었다. 1887년 새문안교회(정동장로교회)에서 장로 임직한 후 서리집사 임직이 있었다. 한국 교회는 독특한 직분으로 영수직이 있었다. 임기는 1년으로 연임이 가능했다. 장로직은 1883년 장연구 대구면 송주교회에서 최초로 장립하였고, 1887년 새문안교회 장로선출, 1894년 백홍준과 서상륜 장로 장립이 있었다. 선교사를 돕는 역할을 하는 조사가 있었고, 1888년에 시작하여 1907년에는 160명이 있었다. 장로교의 최초의 목사는 길선주, 방기창, 서경조. 이기풍, 송인서, 양전백, 한진경 일곱 명이었다.

장로교단의 조직으로는 선교사 중심의 조직인 1889년의 연합공의회가 1901년 장로교공의회로 발전하였다. 1907년 9월 17일 평양장대현교회에서 독노회인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가 결성되었다. 회장 사무엘 모펫(마포삼열, 1864-1939), 한인 장로 36, 선교사 33, 참석회원 9(성서공회, 기독교서회, YMCA, 목사들)명의 총 78명에 7명의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이 추가되었다. 이 노회에서 이들 7인의 목사안수가 있었고, 이미 인도에서 만들어진 12신앙고백을 채택하였다. 1912년 9월 1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평양여성경학원에서 조직되었다. 감리교는 1908년에 첫 지방감리사를 세웠다. 이때쯤 장로교는 45,000명, 감리교 23,000명의 교세를 갖고 있었다. 1930년 12월 2일 협성신학교에서 기독교조선감리회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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