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선교사들의 의료, 교육, 청년, 여성 운동 등에 기여
상태바
초대 선교사들의 의료, 교육, 청년, 여성 운동 등에 기여
  • 운영자
  • 승인 2014.08.13 17:4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신분 타파·천민신부 폐지·인신매매 금지 등 사회제도 개혁에도 힘 써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 신자들과 선교사들이 갖은 핍박을 받았으나 이제 조선의 문호개방과 더불어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는 여건들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얼마지 않아 주변 강대국 사이에서 국가가 존폐위기를 맞게 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선교가 매우 복잡한 환경을 만나게 되었다. 1885년에 입국한 선교사들로부터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게 되었으나 1895년 청일전쟁, 1905년 11월 17일 강압적인 을사보호조약으로 수교권 박탈, 1907년 7월 비밀리 미일간 태프트-가쯔라 조약을 통한 미국이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화 묵인, 1910년의 한일합병조약으로 국권을 상실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러한 암울한 역사적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사회와 문화를 개화하고 계몽하는 일에 크게 기여하였다. 의료 선교사 알렌의 요청으로 최초의 국립의료원인 광혜원이 1855년 2월 25일에 설립되었으며, 곧 그 이름이 제중원으로 바뀌었고, 알렌이 1887년 미국무성의 한국 담당서기관으로 임명받아 떠나게 됨으로 헤론 박사가 운영을 맡았다. 1893년 11월 애비슨이 제중원 원장이 되자 재정을 책임 맡고 있던 장로교선교회의 기관으로 체제를 변경하여 많은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애비슨이 안식년을 맞아 뉴욕에서 열린 선교회의에서 요청하여 클리블랜드의 실업가 루이스 세브란스가 헌금함으로 1904년 9월 23일 14개 분과의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했다.

감리교선교회 소속 스크랜튼 박사는 처음에 2-3개월은 광혜원에서 알렌과 함께 일하다가 1885년 9월 10일에 의료사업을 시작하였다. 1886년 6월 15일에 정부허가로 시병원(施病院, 고종이 지어준 이름)을 세웠다. 감리교선교회는 또한 1887년 10월 20일 메타 하워드양으로 원장을 삼아 이화학당 내에 한국 최초의 부인전용병원(보구여관, 명성황후가 지어준 이름)을 시작하였다. 이는 1930년부터 동대문부인병원으로 널리 알려졌다.

선교사들이 기여한 또 다른 중요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서당과 향교에서 이루어져 왔던 교육(1399년 성균관)은 유교교육이었는데 실제적인 삶에 도움을 주지 못했었기에 새로운 교육제도의 도입은 높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신학문을 위하여 아펜젤러는 1885년 말 두 세 명의 학생을 데리고 근대식 교육을 시작하였고, 1886년 6월에 2명의 학생으로 배제학당을 설립하였다. 스크랜튼의 부인은 1886년 5월 30일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을 세웠다. 이제까지 경시되었던 여성교육이 시작되었다. 언더우드는 1886년 고아들을 데려다가 숙식을 제공하고 교육한데서 경신학교가 시작되었고, 장로교회에서 시작한 정신(貞信)은 안니 엘러스양이 고아를 데려다가 가르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청일전쟁이 끝나고 향학열이 고조되어 사립학교들이 급격히 증가하여 1909년에는 전국에 950개(장로교 605개, 감리교 200개가 포함됨)의 그리스도교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비 그리스도교의 학교들도 많이 생겨났다.

고등교육의 효시는 세브란스학교이다. 1886년 3월 29일 병원의 의학부로 시작되어, 1899년 정식으로 의학교로 설립되어 애비슨이 초대교장이 되었다.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하였다. 이 학교는 1913년부터 장로교와 감리교 연합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연희전문학교는 언더우드선교사의 수고로 1915년 3월 장로교와 감리교가 연합으로 설립하여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 기독교연합재단법인의 설립허가와 학교설립허가를 얻어 문학, 상업, 농업, 수학, 물리, 응용화학과로 개교하였다.

평양의 숭실전문학교는 이미 1906년에 설립하여 1907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공동으로 운영하다가 1913년부터 장로교선교회가 단독으로 운영하였다. 이화학당은 1910년 학과를 설치하여 1912년에 학교인가를 받아, 1914년 전문학교 제1회 졸업생 6명을 배출하였다. 그리스도교는 문서운동을 통하여 복음전도를 하였다. 이러한 선교의 노력은 한국의 근대문화 운동에도 기여하였다. 한글성경과 전도문서들의 활용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한글보급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청년운동 조직으로 장로교에 청년면려회, 감리교에 엡워스청년회가 있었고, 1844년 영국복음주의자들이 결성하였던 그리스도교청년회(YNCA)가 연합청년운동으로 일찍부터 결성되어 활동하였다. 스크랜튼의 부인이 1886년에 설립한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한국 여성들이 신교육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여성들이 처음부터 복음전도나 구국운동이나 계몽자 등으로 적극 참여하여 한국 교회, 사회, 문화 등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사회제도의 개혁에도 힘을 써 양반과 평민신분 타파, 백정과 광대 등의 천민신부폐지, 공사노비 제도를 없애고, 인신매매 금지 법제정에 기여하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