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여자, 진보적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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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인 여자, 진보적인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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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1.11.10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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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인 목사 (예장 통합총회 기획국장)

세상이 돌아가는 모양이 심상치가 않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우리들을 안정적이고 평안히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은 흔들린 지 오래고, ‘하나님의 창조물인 아름다운 지구가 망가졌구나,“라는 것을 피부로 실감한지도 오래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동체라고 굳게 믿었던 교회 안에 부정과 부패,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한 모습들이 삐져나와 세상에 오물을 흩뿌리는 일도 드문 일이 아닌 세상이다. 과연 나는 기독 신앙을 계속 지킬 것인지를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며 묻고 있는 요즈음이다.

얼마 전 우리는 서울 시장 보궐 선거라는 희귀한 선거를 치뤘다. 여러 후보들이 있었지만 결국 보수당이 지원하는 여자 후보와 진보적이라고 불리울 수 있는 시민단체, 시민운동 세력들이 지지하는 남성후보 두 사람의 치열한 접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진보적인 남성 후보가 선거에서 당선된 것은 단순히 진보적 의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지지 해서였을까? 아니면 이 선거에 여성과 남성의 뿌리 깊은 성 차별이 존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나름의 생각을 잠깐 해본다.

몇 년 전, 미국의 대통령 선거전에서 우리는 민주당내 후보 경합에서 있었던 버락 오바마라고 하는 거의 신출내기 흑인 남성 정치인과 힐러리 클린턴이라는 어느 정도 검증되고 인지도도 꽤 높았던 노련한 여성 정치인의 경쟁을 기억한다. 흑인 남성이냐? 백인 여성이냐? 매우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인종차별의 벽이 무너질건가, 아니면 성차별이 먼저 무릎을 꿇을 것인가? 결과는 인종차별이 훨씬 넘기 쉬운 벽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인종이 다른 남성을 지도자로 세우는 것이 여성을 지도자로 세우는 것 보다는 마음 편한 선택이었다는 말이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눈부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여성의 동등한 사회 참여가 이루어지려면 한참 멀었다. 교회는 한참 더 후진적이다. 교회 안에서는 여성은 아직도 문자적으로 창세기를 받아들여 남자의 갈빗뼈 한 개 밖엔 안되는 여성인 것이다.

이 사회 안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로 현재와 과거의 남성 중심적 사회이념이나, 도덕 가치기준을 넘어서고 도전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태어날 때부터 억압의 굴레를 메고 있는 여성이 보수적이라는 것이 불가능하다. 만약 그 여성이 스스로의 여성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다면 말이다. 혹은 여성이되 남성들의 허수아비로, 혹은 구색 맞추기로 끼어 넣은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편 진보적인 남성은 필요한 만큼만 진보적이기 쉽다. 정치, 경제, 사회의 각 부분에서 ‘다수’라는 이름으로 칭해지는 남성들을 기준으로 하면서 진보적인 입장을 견지 할 뿐이다. 가정, 여성, 어린이의 문제가 되면 고리타분한 전통과 문화, 정서라는 이름으로 편리하게 숨어버리기 십상이다.

썩은 냄새가 진동 하는 한국교회 안에 우습게도 개혁과 갱신이라는 이름이 동시에 난무하는 것이다. 보수 신앙의 표본이라고 불리우던 목회자가 갑자기 근본주의적 개혁을 기치로 걸고 나오는 것은 곤란하다. 근본주의적인 성서 읽기를 통한 윤리적 정죄함을 서슴지 않는 개혁은 참으로 곤란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한국 개신교는 개혁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해야할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 개혁이 아닌, 자기를 비워 그리스도의 형체를 닮아가는 개혁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보수적인 여성, 진보적인 남성이라고 할 때 가지는 똑같은 한계가 요즘 한국교회 안에서 판치는 근본주의자의 개혁, 나는 빼고 오로지 남을 향한 갱신의 목소리와 다를 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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