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 희망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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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희망은 더 나은 삶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 최창민
  • 승인 2009.12.30 18: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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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새 희망을 품고 달리는 사람들

■ 2010년, 지하철 첫차 순환선을 타고도는 희망이야기


모두가 잠든 듯 고요한 새벽. 집 밖을 나와 찬 공기를 한 움큼 배어 문다. 잔뜩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큰 호흡으로 하루의 시작을 연다. 이제 막 새로 태어난 하루. 어느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마신 새벽 공기는 삶의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하다. 누구에게나 찾아왔지만 아무나 맛 볼 수 없는 이 맛에 새벽을 사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찾아 지하철 첫차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새벽 4시경. 한산한 도로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야기꽃이 피었다. “매년 연말 연시 망년회다, 동창회다 회식이 많아요.” 이 시간에 택시를 타는 손님들을 물었더니 대부분 술손님이란다. 간혹 새벽에 일찍 길을 나서는 직장인이 있지만, 택시를 타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다.

“요새는 경제 위기 때문인지 예년처럼 손님이 많지는 않습니다.” 푸념 섞인 택시기사의 하소연이 자못 절박하다. 택시기사로 15년을 살아온 김기중(43) 씨는 내년에 대학을 준비하는 딸아이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것이 가장 큰 소원이다. 가족의 건강도 바라는 것 중 하나다. 모든 아버지들의 바람이기도 하다.

하루 내내 젊음과 개성이 넘쳤던 홍대입구역 주변의 새벽은 여느 역과는 사뭇 달랐다. 방학을 맞아 전날 저녁부터 새벽녘까지 밤새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연인들이 눈에 띄었다. 클럽에서 밤을 지새우다 취기어린 눈으로 집으로 향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지하철 첫차를 타는 사람들은 새로운 하루를 힘차게 준비하는 바지런한 사람들이 많았다.


# 새벽 4시반, 홍대입구역 첫차에 몸을 싣다

기차가 출발하기 20여분 전부터 대기하고 있던 전동차 안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빈자리를 채웠다. 군 입대를 5일 앞둔 김한영(22) 씨. “학교 다니면서 종종 첫차를 탔는데 하루를 빨리 시작하는 기분이어서 참 좋아합니다.” 입대 전에 친구들과 아쉬움을 달래며 놀다가 첫차를 탔다. 이제는 첫차가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한다.

“좋은 고참을 만나고 싶습니다. 군 생활이 두렵기도 하고 떨리기도 하네요. 2010년은 잊지 못할 한해가 될 것 같습니다.” 지하철 첫차를 타고 버스터미널로 가 고향인 부산으로 향하는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가족들과 고향 친구들과도 회포를 풀고 입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아들이라면 누구나 거쳐야할 군대. 김 씨는 그 어느 해보다 생경한 2010년을 보내야 하는 사람 중 하나가 됐다.

“금융권 취업을 준비할 예정이에요.” 내년이면 3학년이 되는 조은정(22) 씨는 회계학인 전공을 살려 은행이나 증권사에 취직하기 위해 2010년은 어느 해보다 바쁜 한해를 보내야 한다. 금융권 취업을 위해서는 토익 900점 이상과 금융 자격증 서너 개는 기본. 아직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녀는 마음이 무척 다급하다. 해마다 가중되는 취업난 때문이다.

“방학이지만 도서관에서 밤이 늦도록 불을 켜고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아요.” 지하철을 타고 가는 짧은 시간에도 토익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첫차를 탄 이유도 도서관에 가기 위해서다. 자리 경쟁이 치열한 탓에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내년 한해는 준비하고 있는 자격증을 모두 취득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자신을 비켜가지 않는 취업 한파가 싫지만 당당히 맞설 준비를 하는 그녀는 오늘날 대학생들의 초상(肖像)이다.


# 습관처럼 첫차를 오르는 조 할아버지

매일 새벽 첫차를 타는 조판성(73) 할아버지는 평생 구두 손질을 해왔다. 화곡동에서 지하철 첫차를 타기 위해 마을버스 첫차를 놓쳐서는 안 된다. 집에서 4시10분에 길을 나선다는 조 할아버지는 직장이 있는 낙성대까지 열세 정거장을 거치는 동안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고 한다. 매일 첫차를 타는 것이 피곤할 법도 한데 “습관이 되니 괜찮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신다. 새벽에 일찍 자리를 잡아야 출근길에 구두 손질하는 손님들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새벽을 살았던 그에게 첫차를 타는 일은 그다지 힘든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양화점에서 일을 배운 것이 조 할아버지의 평생 직업이 됐다. 평생 궂은 일을 해온 탓에 구두가 닿는 손 자리마다 굳은살이 차올라 있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일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네.” 구두 손질 기술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잘 키워 가르칠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는 ‘감사’라는 단어를 꺼냈다. 자녀들은 결혼해 출가하고 할머니와 단 둘이 살고 있는 조 할아버지는 “올해 바람은 다른 것 없어. 우리 할멈이랑 작년처럼 건강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새벽에도 노구(老軀)를 이끌고 습관처럼 첫차를 오르는 조 할아버지는 지난 반백년 한국 사회를 이끌어온 저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투덜거리지 않고 묵묵히 살아오신 어르신들의 근면이었다.


# 희망을 만나 반갑다

여기저기 잠을 청하는 사람들 사이로 한 아주머니가 비집고 들어와 앉았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에서 살고 있는 김영옥(가명·43) 아주머니는 2호선 반대편인 역삼역까지 가서 건물 청소 일을 하신다. 인터뷰를 연거푸 거절하시더니 풀어놓은 이야기보따리 속에는 눈물 젖은 사연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불과 5년 전. IMF 한파로 잘 나가던 남편의 사업이 실패했다. 변변한 직장 없이 한창 커가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다. 몇 차례 재기를 꿈꿨지만 남편은 실패를 거듭했고, 거의 자포자기하며 집에 누워만 있었다. 김 아주머니가 청소 일을 시작한 것도 이때쯤이다. “누군가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 마땅치 않아 이 일을 시작했어요.” 언젠가는 다시 일어서겠다는 한 가닥 희망이 그녀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어려서부터 힘든 일을 많이 해왔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해요.” 아내가 매일 새벽일을 나가 부지런히 사는 모습에 감동했던지 남편도 최근 다시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2010년에는 가족들이 건강했으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자식들에게 신세 안지고 살았으면 하는 것이 소원입니다.” 지하철 첫차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하는 김 아주머니의 말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말을 듣다보니 어느새 지하철 첫차에 많은 사람들이 올라타 있었다. 개중에는 그녀가 말하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의 희망이 모여 첫차가 달리는 이유가 된듯했다.


# 막 태어난 아이같은 감동 있어

“지하철 첫차는 정확히 5시30분에 출발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늦거나 빠르면 손님들은 15분을 더 기다려야 합니다.” 전동차 시동키 역할을 하는 쇠뭉치 하나를 들고 맨 앞 칸에 올라탄 심승구 기관사(45)는 지하철 중 유일한 순환선인 2호선을 운행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특히 새벽 첫차를 운행하는 짜릿함을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매년 새해 첫날을 운행하는 기관사는 특별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는 첫차 운행을 출산에 비유했다. “아이가 막 태어나는 기쁨처럼 한해, 하루를 시작하는 날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갑고 행복해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알 수 없죠.”

심 기관사는 2호선 순환선 43개 정거장 중 한강다리를 건너는 합정-당산, 성내-강변 구간을 가장 좋아한다. “출퇴근 시간이면 꽉꽉 막히는 도로에 비해 거침없이 달리는 것이 지하철의 가장 큰 장점이죠. 새벽 동틀 무렵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가는 구간에서 느끼는 상쾌함, 막힘없이 질주하면서 일출을 보는 것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답니다.”

지하철 맨 앞에서 한강 변을 따라 조금씩 밝아지는 하루를 보는 것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역동하는 서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관경이었다.


새벽 첫차를 운행하면서 겪는 가장 큰 애로사항은 역시 피로감이다. 자칫 깜빡 졸기라도 하면 큰일이 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긴장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혼자 운행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동원된다. 회사에서는 톡톡 쏘는 입자를 지닌 껌이 제공된다. 혼자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반대편에 있는 부기관사와 안부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은 승객이다. “새벽 첫차는 연세가 있으신 분들과 열심히 사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첫차를 타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선 승객들을 보면 활력을 얻습니다.” 이들의 안전을 위해 조금도 빈틈을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올해로 15년 째 지하철을 운행하고 있는 심승구 기관사는 서울 메트로 신우회 회원이기도 하다. 경기도 군포 세계로교회(담임:강용규 목사)에서 구역장도 지냈고 지금은 집사로 섬기고 있다. “휴일이든 주일이든 요일에 관계없이 일을 하다보니 예배 시간과 맞지 않을 때가 있지만 늘 기도하면서 일을 합니다. 지난 15년간 안전을 지켜주셔서 사고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가장 큰 감사입니다.”

새해 지하철 첫차는 그야말로 희망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아니 2010년은 희망을 가득 싣고 새벽을 힘차게 사는 이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와 군 입대를 앞둔 청년, 취업을 준비하는 여대생과 구두 손질하는 조 할아버지, 건물 청소하는 김 아주머니와 전동차를 운행하는 심 기관사까지. 첫차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에게 2010년은 그 어느 해보다 빛나는 한해가 될 것 같다. 희망은 지금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모든 부지런한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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