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그곳엔 순교자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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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그곳엔 순교자의 숨결이 남아 있었다”
  • 현승미
  • 승인 2005.03.16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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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성지순례선교회와 함께한 ‘기독교문화유적지’ 탐방기




지금의 한국 교회는 초기 선교사들의 희생적인 헌신과 초대 교회 신자들의 피 흘림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가난한 나라, 믿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서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면서까지 지켜내려 했던 신앙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궁금증이 더해졌다. 모두들 소홀히 생각하는 국내 성지, 이곳을 발굴하고 초대교회 순교의 신앙을 계승하기 위해 발족된 한국성지순례선교회(회장:박경진장로)와 함께 120년의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그들 신앙 선배들의 순교지와 기독교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지난 10일,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하늘이 순교자들의 숭고한 죽음을 알아주듯 아침부터 비를 뿌리고 있었다. 아침 출근길, 분주한 발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을 뒤로하고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개신교가 이 땅에 뿌리 내린지 100주년을 기념해 건립됐다. 기념관에 들어서기 전 500m의 쭉 뻗은 작은 길을 따라 세워진 순교자의 이름과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는 순교자기념비를 먼저 발견할 수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평양에 들어와 선교하다 순교한 토마스목사의 참수 장면을 생생하게 그린 혜초 김학수 화백의 대형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소나무의 푸르름을 자랑하는 대동강변의 한쪽에는 미국 상선 제네럴 셔면호가 불타고 있고, 불타는 배에서 뛰어내리고 있는 서양인들, 그 배를 향해 활과 총포를 겨누고 있는 한국 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그리고 강변에서 처형을 앞둔 토마스 목사와 그 앞에 놓인 성경책과 평양 주민들도 있다.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기념관 2층 예배실에는 1930년대 이전의 교회와 사회 모습을 담은 사진 120점이, 3층에는 202명의 순교자들의 사진, 성경,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마지막 초상화 대신 ‘당신도 순교자가 될 수 있다’고 적힌 거울에 비친 기자의 얼굴을 되내이며, 한국 최초로 세워진 ‘소래교회’를 복원해 둔 총신대학원 양지캠퍼스로 발길을 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 ‘소래교회’

소래교회는 만주와 조선을 오가던 인삼장수 서상륜에 의해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졌다. 갑작스런 열병으로 가게 된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병원에서 로스 선교사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만나게 되고 맥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로스 선교사의 성경 번역을 도왔던 그는 완성된 성경 100여 권을 들고 국내 잠입을 시도했으나, 관헌에 발각돼 구사일생으로 성경 10여 권 만을 지닌 채 탈출해 고향인 황해도 소래에 교회를 세우게 된다. 역시 선교 백주년을 기념해 양지캠퍼스 생활관 뒤쪽에 복원된 소래교회 마당에는 일제시대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전도했던 최권능 목사의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더욱이 놀라운 사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우리 손으로 직접 헌금을 모금하고, 나무를 베어와 세운 온전한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였다는 점으로 우리 선인들의 곧은 의지가 엿보였다.


하루 사이 전라남도까지 내려가야 하는 짧은 일정에 맞추기 위해 서산 해미순교지를 뒤로한 채 곧바로 ‘ㄱ’자 예배당이 있는 김제 금산교회로 향했다. 금산교회는 1904년 미국 남장로교 테이트 선교사가 40개의 사교가 산재해 있는 금산리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전도하기 시작했고, 이 고장 마방의 주인인 조덕삼을 만나 복음을 전하게 된다.

훗날 주인을 따라 예수님을 믿게 된 마부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어, 집에서는 이자익이 조덕삼을 섬기고 교회에서는 조덕삼이 이자익을 섬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금산교회는 남녀석을 따로 지을 만큼 보수적이었고, 주일을 범하면 권면 처분하고, 가정 불화하거나 부모에게 불효하면 성찬 불참 처분하였으며 귀신 공경하거나 도박하면 아예 출교시키는 책벌을 내리는 듯 규율이 매우 엄격했다.

강대상을 중심으로 ‘ㄱ’자 모양의 한편은 남자들이 또 다른편은 여자들이 예배를 드렸다. 교회 외부는 당시보다 많이 변형됐으나 내부는 당신 당회록부터 상량문을 비롯한 풍금, 옛 신발장까지도 그대로 보존돼 있다. 금산교회는 한국에서 하나밖에 없는 ‘ㄱ’자 교회당으로서 현재 지방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성도들이 세운 ‘두암교회’

길가에 세워져있는 금산교회와 달리 정읍 두암교회는 정읍 시내에서 한참을 들어가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두암마을 사람들은 15리나 떨어져 있는 마을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으나, 해방이 되면서 성도들이 마을에 교회를 세웠다. 그러나 6.25전쟁 중 쳐들어온 공산군에 의해 윤임례 집사를 비롯한 둘째 아들 김용채 집사, 며느리 조선환 집사 등 일가족이 학살됐으며, 정읍농고 학생회장이던 김용술 씨와 그의 가족, 김용은 전도사의 친구 박호준씨 등 23명이 학살 전후로 순교했다. 현재 66년에 새로 건축한 교회 건물 옆에 23인의 순교기념비와 합장묘를 찾아볼 수 있을 뿐 옛 교회 터와 순교지는 텃밭으로 변해 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지리산 선교 유적지를 돌아볼 계획으로 숙소를 남원으로 정했으나, 웬일인지 또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결국 기독 진료소가 있는 순천으로 일정을 수정했다.


1907년 설립된 순천중앙교회, 선교사들의 생활 공간이었던 지금의 매산중학교, 순천 기독진료소, 순천 성서신학원 건물들이 나란히 남아 당시 선교사들의 활발한 선교 활동을 대변해 주고 있다. 특히 휴 린톤(한국명 인돈) 선교사 부부가 결핵 환자들을 위해 세웠던 기독 진료소 2층의 기독교역사박물관에서 당시 전남 지역의 선교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최근에는 당시 선교사와 자녀들이 쓰던 침대, 의자, 쇼파며 부엌도구까지도 찾아내 재현해놓아 한층 볼거리를 더했다. 들을거리, 볼거리가 풍부한 탓에 순천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해 인솔자였던 은춘표 장로의 채근으로 손양원 목사 기념관이 있는 여수 애양원으로 향했다.

여수 공항터미널에서 2km 정도를 들어가면 애양약국, 애양병원을 비롯해 애양원 역사박물관, 애양원교회, 순교자 묘지,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을 찾아볼 수 있다. 애양원은 1909년 미국 포사이드 선교사가 길가에 버려진 한센병 환자를 데려다 치료하기 시작하면서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나병원으로, 애양원교회는 손양원 목사가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1939년 7월 2대 교역자로 부임하여 1950년 9월 28일 공산군에 의해 순교할 때까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봉사했던 교회다.


손양원목사의 흔적 느껴져

차에서 내리니 치유된 한센병 환자들의 정착지인 도성 마을에서 풍겨져 나오는 가축의 분비물 냄새가 주변에 가득했다. 마을 안쪽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순교기념관은 삼위일체의 형상으로 손양원목사 삼부자를 나타내고 있다. 전시실에는 삼부자의 생애를 재현한 그림과 유품들이 전시돼 있는데, 한센병 환자의 발바닥을 자신의 혀로 핥아주는 그림 앞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현재까지도 많은 순례자들의 기도 장소로 활용되고 있는 순교자 묘지에는 손 목사 부부의 합장묘와 그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묘가 바다를 향해 있다. 애양원 역사박물관은 애양원이 여수로 이주한 후 현재의 현대식 병원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센 환자들을 치료했던 병원 본관 건물로, 당시에 사용됐던 의료 기구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의료진들과 환자들의 생활상 등이 옛 모습 그대로 생생하게 전시돼 있다.

이곳에서 순교기념관 그림 속에서 봤던 환센병 환자의 발바닥을 사진으로 보고난 후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사진으로 보는 것조차 버거운 그 발바닥을 핥아주기까지 했던 손양원 목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했다.


1924년, 1973년, 2003년에 각각 건립된 석조 예배당과 철근 콘크리트 예배당이 나란히 자리해 있는 여수 장천교회에서 세월에 따른 교회 건축의 변화를 잠시 감상한 후 다시 남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비는 그쳤으나 예상보다 늦은시간에 노고단을 오르게 돼, 해지기 전에 산을 내려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높이 1,507m의 노고단은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으므로 최대한 완전무장을 했다. 이토록 높은 곳에 수양관을 짓게 된 이유는 한국의 풍토병과 수인성 질병으로 인해 많은 선교사 가족들이 사망했고, 특히 여름철 어린이의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유진벨 선교사와 한남대학교 설립자인 윌리엄 린턴 선교사 등에 의해 건물 50여 동이 건축됐으나. 6.25사변을 전후해 파괴돼 이웃에 있는 왕시루봉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고 지금은 그 흔적만이 남아있다.


순교자들은 우리에게 굴하지 않는 믿음과 변함없는 복음을 선물로 남겨주었다. 그러나 우리 손으로 지켜내야 할 선교유적지는 무관심과 방치 속에 망가져가고 있었다. 용인의 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관리가 허술해 액자에 곰팡이가 슬어 있고, 소래교회 역시 방수가 되지 않는 지붕을 파란 천막으로 덮어놓았으며, 지난해 떨어져나간 문은 여전히 방치되고 있었다.

그나마 남도 지역은 교회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유적지의 보존과 복원이 잘 되어 있어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 더 많은 기독교 유적지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데 한국 교회의 노력이 절실함을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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