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 단군상 철거촉구에 대해
상태바
특별기고 // 단군상 철거촉구에 대해
  • 승인 2001.06.2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군상, 더 이상 침묵은 죄악”

1. 회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절대 바보가 아니다. 들을 줄도 모르고 말할 줄도 모르는 그런 바보가 아니다. 그런데 억울하게도 우리는 지난 50년을 바보처럼 살아왔다. 우리 고신 교회를 비롯한 보수 교회들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우리 사회의 수많은 문제에 관해 제대로 소리 한번 내지 못하고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나라를 찬탈한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목숨을 걸고 저항했던 역사적 그리스도인들의 후예답지 않게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역사의 흐름과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면 그만인 줄 알았다.

우리가 역사를 외면하는 사이,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 그리스도인이 역사의 중심에 서는 듯 했지만 부끄럽게도 그는 지금 실패한 대통령으로 낙인찍혀 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잇따라 터져 나온 온갖 비리사건들에는 한결같이 기독교 신자들이 연류되어 우리를 괴롭혔다. 침묵하던 교회는 마침내 침몰의 자리로 나아가고 있는 듯한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에게로!’라며 흥분하던 교회가 맥없이 주저앉고 말 것 같은 기막힌 현실을 목도하게 됐다.

2. 반전
이런 와중에 1998년부터 난데없이 단군상이 이 나라 곳곳에 세워진 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님을 비로소 알게됐다.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잃어버려 질타를 받기 시작할 때, 학교마다 3백 만원짜리 플라스틱 단군상이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학선원이라는 수련원을 세워 1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면서 점점 자신을 절대화하는 자리로 빠져든 자가 물론 문제다. 단군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종교적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결국 천하를 아래로 모으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욕망을 지닌 한 사람이 98년 한문화연합회를 창설하고 전국 곳곳에 3천6백 개의 단군상을 세울 야욕을 갖고 3백60여 개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무명의한 인간의 야욕에 기다렸다는듯이 국·공립 학교의 장들이 선뜻 응했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3. 사명
그러므로 지금은 우리가 나서야 한다.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할 수 없다.

1) 단군상 건립은 단순히 우상숭배의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역사의 책임과 상관된 일이다. 이제 우리는 역사의 방관자의 자리에서 일어나 역사의 현장 한복판으로 나아가기를 결심해야 한다. 이 땅의 주인의 자녀로서 역사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를 똑똑히 살피며 책임지고 관여해야 한다. 역사는 결코 남의 것이 아니다. 구약 역사에 나타난 선지자들은 결코 역사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 늙어 많은 왕비들의 말을 좇아 이방의 신들을 섬기는 죄를 범하자, 하나님은 아히야 선지자를 통하여 옷을 찢어 열 조각을 주며 여로보암에게 열 지파를 맡길 것을 예언했다. 나라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말이다.

2) 그래서 남아있는 모든 단군상이 완전히 철거되는 것을 보아야 한다.
단군에 대해 어떤 학문적·이론적 이유를 대든 단군은 현재 단군교·대종교의 경배대상이다. 다음 새대가 자라는 국·공립 학교에 어떤 이유로도 인간이나 신화적 인물을 참배의 대상으로 설치할 수 없다. 단군을 상징적 의미에서 벗어나 이 나라 모든 백성들의 숭배대상으로 삼자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천지의 창조자시요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우리 앞에 있을 수 없다.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백성을 호도하면 않된다. 우리도 한민족이다. 공교육의 책임을 진 정부는 즉각 모든 학교로부터 단군상을 제거하도록 명령해야 한다.

이제 우리 모두 진리를 위해 목숨을 걸자. 모든 지혜를 동원해 불의한 일들을 저지하도록 나서자.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임하도록 소리 높여 기도하자. 하나님처럼 높아지려는 모든 인간의 야욕을 깨뜨리는 일에 모두가 앞장서자. 오늘 이 결심이 우리의 남은 생애를 불같이 태워가도록 우리를 주께 드리자. 더 이상의 침묵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임을 잊지 말자.

이성구 교수 <고려신학대학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