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3.1운동-국민대통합 위한 모델로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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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3.1운동-국민대통합 위한 모델로 바라보자
  • 윤영호
  • 승인 2005.02.2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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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갈이 찢겨진 대한민국의 마음을 한데 모으는 지혜 필요
현재 서울 시청 앞 덕수궁(대한문)앞에 모인 3.1만세 시위 참가자들. 남녀노소, 계층을 막론하고 모인 이들 앞에는 그 어떤 것도 연대와 협력을 방해할 수 없었다. 오직 평화와 자유만을 갈구했을 뿐이다.
 


3.1국민대통합과 한국기독교
:

“갈등으로 이완된 교회구심력 다시 확보해야”   

이 시대 3.1운동을 다시 보는 이유는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우리나라의 최근 상황 때문이다. 근대화 시대를 뒤덮은 일제강점은 우리나라의 전근대 사회질서를 강제적으로 해체하는 한편 식민반봉건 질서를 수립해 나갔다. 일제대항운동은 따라서 민족독립을 쟁취하는 최소한의 몸부림이었으며 강압적 ‘식민반봉건 체제’를 거부하는 혁명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3.1운동 앞에 취한 교회와 각성엘리트층의 ‘하나됨’이다. 세계재편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21세기를 뒤덮은 가운데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구심력을 확보하지 못한 채 재편의 중심대열로부터 밀려나는 듯한 인상을 보이며 86년 전 이미 이룩한 ‘하나됨’의 쾌거를 재연하지 못한 실정이다. /



3.1운동은 제국열강에 대한 ‘반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힘 우월의 세상논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3.1정신에 함축돼 있는 것이다. 여기서 3.1운동이 비폭력을 중시한 이유가 나타난다. 당시 세상의 논리가 강압과 힘을 바탕으로 하는 제국적 속성이 모든 것에 침투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힘에 의한 반항’을 철저히 봉쇄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비폭력저항운동의 세계사적 상징
86주년을 맞은 3.1운동을 재조명하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힘 우월의 시대’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명분만 좋으면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그것이 힘에 의한 방법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용납되는 그런 시대를 살고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86년 전 우리 민족이 3.1운동 앞에 어떤 자세를 취했느냐는 점이다. 기록에 따르면, 3,1거사를 앞두고 모든 독립운동 계파들이 ‘같은 생각’을 가진 것만은 아니었다. 만세운동 과정에서 생길 엄청난 피해를 어떻게 감수하느냐의 논쟁으로 무장투쟁 세력과 비밀지하 운동단체들이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이 갖는 ‘반(反)힘 우월’과 ‘반제국주의’ 그리고 ‘평화주의’라는 세계사적 의미에 굴복, 결국 민족적 하나됨의 상징성을 실현할 수 있었다. 물론 3.1운동 이후 받은 독립운동계의 엄청난 타격은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비롯 해외 독립운동과 고려사회당을 주축으로 하는 무장투쟁의 활성화를 촉진시켰다.


`힘 우월`의 제국적 속성을 만천하에 폭로
3.1운동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꾸준하게 전개돼 왔던 독립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진 열매라고 할 수 있다. 1905년부터 가시적으로 드러난 거국적 분위기는 선교사와 초기교회들이 전개한 구국기도회를 시작으로, 1907년 신민회와 이어 일어난 105인 사건, 그리고 안중근, 우연준(이토오 히로부미 암살사건), 이재명(이완용 암살미수)등의 항일무장투쟁 등으로 이어졌다.


신민회는 교육계몽운동을 표방한 것과 달리 비밀 독립단체 성격이 강했다. 국외에서 한국에 들어와 학교를 설립하며 애국교육을 시킨 이승훈 안창호 이동휘 등이 주축으로 만든 단체로, 기독교인이 대다수였다. 학자들은 3.1운동이 국민각성운동을 펼쳐왔던 기독교인들의 노력이 응집돼 나타난 결실로 분석한다.


‘구국을 향한 국민대통합’의 상징이 3.1운동에서 발견된다는 얘기다. 남녀노소, 신분을 막론하고 일어난 3.1운동은, 부분적으로 폭력의 양상을 띠기는 하지만 비폭력저항이라는 거대한 물줄기의 흐름을 타고 꽤 오랫동안 대중적인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격동의 식민시대 앞에서 우왕좌왕 하던 한국민들의 잃어버린 구심점을 회복하는 자극제가 됐고, 기득권에 연연하던 특별 계층들까지도 국권회복 수호에 태극기를 휘날렸던 ‘통합의 상징’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대테러전쟁 속 세계사 앞에 우리는 `분열 중`
1919년 3.1운동의 대통합 성격을 되돌아보면서 우리는 또 한 차례 격동의 시대를 맞은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대테러전쟁을 수행하는 미국주도의 중동재편 정책이 결국 아시아권까지 영향을 미쳐 북한에 대한 엄청난 압박을 보여 우리나라는 북한에 대해 혹은 시대를 주도하는 미국에 대해 갖가지 명분을 들며 혼란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심각한 것은, 대국민통합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해야 하는 종교계까지 정치적인 올가미에 묶여 정파적 성향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기독교계의 입장이 그러하다.


3.1운동 86주년을 맞은 현 시점에서 우리 한국기독교가 받아들여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

한남대학교 최성수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남북관계, 동서관계, 빈부관계, 여야의 상극적인 관계, 분열된 교회와 사회각계각층의 갈등 등 한국교회 만큼 하나됨의 과제가 절실하게 여겨지는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가 혼동에 빠져 있을 때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됨에 있어서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최성수 교수가 말하는 교회의 하나됨은 교파분열을 전제한 개념이지만, 사실 우리는 한 교파 안에서 조차 다양한 시각 차이를 경험하고 있다. 이같은 분열경험은 신학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차이의 문제라는 사실에 더욱 놀라게 된다. 영국의 복음주의 지도자 ‘마틴 로이드 존스박사’는 “우상제단에 바쳐진 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린도교회는 내부에서 분열됐다”고 설명하며 분열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교파분열 넘어선 기독교 갈등의 현주소
이런 맥락에서 한국기독교의 분열은 교파갈등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 안보적인 국익관계에서는 교파를 넘어 큰 긴장감마저 형성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한 교단에서 첨예한 대립의견들이 쏟아지면서 한국기독교는 3.1대통합의 역량을 점차 소진하고 있다.


우리는 각 교파 속에 자리 잡은 다양한 경향들, 이른바 에큐메니칼주의자와 개혁주의자를 포함한 복음주의자, 그리고 보수근본주의자들의 목소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교회연합과 협력을 지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벌써 천갈래 만갈래로 찢겨진 교파라기보다 이같은 교파분열의 원인을 제공해온 ‘신학적인 바탕’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한미동맹을 주장하며 수차례 서울시청 앞에 모인 기독교인 가운데 복음주의자나 에큐메니스트를 발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기독교 보수근본주의를 표방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또 가톨릭과 루터교, 복음교회 등이 참석하는 행사에는 복음주의자나 보수근본주의자의 참석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교파를 초월해서 열리는 대규모 집회에서 조차 우리들은 일체감을 드러내지 못하고 늘 분열을 경험하곤 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파, 복음주의, 보수근본주의 첨예대립
86년을 지나고 21세기로 들어선 한국기독교가 3.1정신을 발전적으로 계승해야 할 이유는 너무나 뚜렷하다. 여전히 분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갇힌 상태이기 때문이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조’는 교회를 ‘하나됨’ ‘거룩함’ ‘보편성’ ‘사도성’이라는 네가지 요소로 정의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최근 ‘사도성’을 강조하며 성도의 제자화와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주창하고 있지만, ‘하나됨’(일치성)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은 상황이다. 그래서 86년이 지난 지금까지 3.1정신의 국민대통합 기능이 한국기독교에서 발현되길 모두가 기원하는 것이다. <윤영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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