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무대…부끄럼없는 배우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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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무대…부끄럼없는 배우이고 싶다
  • 현승미
  • 승인 2005.02.24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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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증거하는 탤런트 임동진 장로


잘생긴 외모와 멋진 목소리를 지닌 중견 연기자 임동진. 연기자라는 직업 때문인지 겉모습만으로 판단되는 그는 부자집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랐을 것 같다. 평생 부족한 것 없이 자신이 원하는대로 편안한 길을 걸어왔을 것 같은 그의 당당함.

그러나 그를 가까이에서 대하게 되면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는 커다란 눈망울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 슬프고 아파하는 눈.


1남 2녀를 둔 한 가정의 가장으로, 인정받는 연기자로, 극단 예맥의 대표로, 교회의 장로(주님의교회·담임:문동학 목사)로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는 그에게도 남들이 겪는, 아니 그보다도 더 힘든 고통이 찾아왔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일제의 식민지 하에서 해방이 되던 1945년 그는 어머니 등에 업혀 월남을 해 인천에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5년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군군함을 타고 이른바 1·4 후퇴의 길에 접어든다. 이때 아버지는 인천에 그대로 남아계셨고, 그것이 임동진이 기억하는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이다.


생활력 강한 어머니 덕분에 부산의 피난 시절은 그럭저럭 버텨나갈 수 있었지만, 그런 삶이 버거웠는지 어머니조차 극약을 마시고 그의 곁을 떠났다.

“어린 꼬마였을 때 악기 든 아저씨들이 모여서 피난민, 화전민 위로 공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엄마의 18번이었던 ‘추억에 운다’를 불러 1등상인 월남미쌀을 받았어요. 그 노래는 어머니의 영혼을 달래는 어머니의 찬송이었지만, 그것이 결국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는 아이들도 모두 성장해 맏아들도 자신의 가정을 꾸려 손주들까지 본 임동진은 자신의 불행한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지 유난히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함을 강조했다.

“큰아들이 성결교 목사로 섬기고 있는데, 손주 녀석들이 집에 가끔 놀러오면 제 앞에서 재롱떨며 부르는 노래가 찬송가예요. 자녀들 앞에서 찬양 불러주는 엄마, 아빠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은혜인지 모릅니다.”


부모가 자신을 책임지지 않았다는 생각으로 청소년기를 살았던 임동진은 추하고 형편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한다. 1968년 연기자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연극계에서조차 그의 행실이 구설수에 오르내리곤 했다.

그런 그의 삶이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달라졌고 지금의 임동진장로가 있게 된 것이다.


“저는 하나님이 쓰시는 막대기, 하나님이 타시는 나귀에 불과한 종입니다. 정말 불가능한 자를 가능케 하시고, 어려운 상황, 조건 속에서 건지셔서 저를 택하여 주신 것이지요.”

역사 속의 선지자들에게, 또 마가 다락방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불같이 임하셨던 것 같이 그의 곁에도 임재하심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연기자로서의 삶이 성공의 길에 들어섰을 때도 그는 신앙심을 잃지 않았다.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주일 성수는 기본, 모든 일 앞에 하나님이 우선이었다.

“하나님을 제가 먼저 영접했지만, 제 아내의 기도와 헌신 덕분에 신앙을 잃지 않았고, 연기자로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실 결혼 당시 임 장로 아내의 집안은 불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장인 어른은 큰 사찰의 재정부장을, 장모님 역시 그 사찰의 보살 회장을 맡고 계셨다.

“돌아가실 때 장모님은 권사로, 장인 어른은 장로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제가 둘째 사위였는데,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할 때마다 장인 어른이 ‘임 장로 오면 시작하자, 임 장로에게 물어보자’하시며, 저를 신뢰하셨죠.”

처음엔 조실부모하고, 종교도 달랐던 그와의 결혼을 반대했었지만, 임동진이라는 사람 하나 보고 귀한 딸을 시집보냈던 장인 어른의 수첩에 훗날 1순위로 적혀있을 정도로 인정을 받게 됐다.


“결혼한 후 아내 또한 정말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됐습니다. 근데, 제 어릴 적 성장과정 때문인지 아내를 의심하기도 했죠. 촬영 도중 집에 전화해도, 며칠씩 계속되는 촬영을 마치고 와도 집은 비어있고, 아내는 매일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그는 아내의 기도와 교회에 대한 헌신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자신이 연기자로써 더 성공하게 됐음을 한참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연기자라는 직업 때문에 늘 세속적인 것들의 유혹에 빠지기 쉽지만, 오히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전파하고자 노력했던 임장로는 1992년 극단 예맥을 창단하게 된다. 아내의 오래 기도 끝에 ‘예수님의 뜻을 받아 예수님의 맥을 잇는 극단’이 되라는 응답을 받게 됐다.

“제가 연기생활한지 벌써 36~7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왕’ 역할을 많이 했는데, 이 세상의 배역 중 가장 멋진 모습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기독교의 의미를 알리고, 연극을 통해 인간의 회복을 꿈꾸며 창단된 예맥은 많은 우려 가운데에서도 1992년 ‘땡큐 하나님’을 시작으로 2003년 뮤지컬 ‘킹’까지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


하나님은 이런 그의 성공이 자칫 자만으로 이어질까 우려하셨을까? 4년 전 갑작스럽게 과로로 인해 ‘뇌경색’이 찾아왔다. 병원에서 장례 준비를 시작했을 때, 임 장로는 예수님의 뒷모습을 본 것 같다고 고백했다.

“4일 후 깨어났지만, 연기자인 저에게 의사들이 휠체어를 타야 한다더군요. 살려주셨으면 걸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23일 만에 병원에서 걸어나올 수 있었죠.”

두 발로 서 있는 것, 음식 맛을 감별할 수 있는 것 등 작은 것만으로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임 장로.


“대문호 세익스피어는 ‘세상은 무대고, 인생은 배우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무대는 재공연이 가능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상무대는, 임동진의 삶은 재공연이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도록 살아야지요.”

우리나라의 고통스러웠던 역사 속에서 산 증인으로, 역사의 희생자로 어려움을 겪었던 그가 오직 하나님이라는 ‘배경’ 덕분에 새 삶을 찾게 됐다.


놀랍게도 이 모든 고백은 그가 즐겨 부르는 찬송 495장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지금의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당당함은 풍요로운 재산도 아니요, 연기자로서 성공한 그의 영화로움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그와 함께 동행 하시리라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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