펼쳐보는 교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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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보는 교회론
  • 윤영호
  • 승인 2005.01.18 20: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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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론적 교회정체성 확립이 필요하다
 

영적 무능력 틈새로 들어온 세속윤리 극성


교회에 대한 새로운 고민들이 시작되고 있다. 교회가 무엇인가. 무엇을 하는 곳인가. 공동체인가 기구인가 등등 교회에 대한 고민들이, 숨어서 이루어지던 경향을 넘어 이제는 공개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특히 정치계의 세대교체로 나타난 정치이념의 급격한 변화를 목도하며 한국기독교는 사회참여 기관으로 운신의 폭을 넓히려 다양한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 복음전파와 하나님나라 선포를 통해 전 인류 구원이라는 대사명을 갖는 하나님 나라의 전진기지인 교회가 과연 사회 속에서는 일종의 기관으로 자리잡아야 하는지 최근 격론이 거듭되고 있다.



현 담임목사와 원로목사의 갈등으로 촉발된 광성교회 사태가 우려했던 대로 노조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담임목사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다며 그동안 받은 불이익을 차단하기 위해 일부 부교역자 및 직원들이 노조를 만들어 ‘법적 구속력’(노동관계법 및 노조법)으로 대항하고 있는 것이다. 광성교회측은 노조설립 직후 인사위원회를 조직, 노조와 위원구성를 놓고 논의했으나 양측(교회측/노조측)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현재 극심한 대립 상태다. 대표적인 예로 광성교회를 제시한 것인데 이같은 경향은 시간이 갈수록 더 확산되는 추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교회에 조직된 노조의 활동범위나 노조원의 자격요건 같은 지엽적인 것들이 아니다. 노조는 고용인과 피고용인를 전제하는 개념으로, 이제 담임목사는 고용인으로 둔갑되고 교회직원과 부교역자 등 교회로부터 급여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피고용인이 됐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적공동체로만 믿어왔던 교회가 이제부터는 일종의 회사 내지 직장개념으로 전환됐음을 보여준다. 



나약해진 교회로 침투한 세속윤리

왜 이렇게 됐는지 한 번 생각할 일이다. 여기서 노조를 문제 삼는 것은 노조가 악한 조직이라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노조구성이 가능할 만큼 허약해진 우리 교회의 ‘영적 무능의 실상’을 단적으로 드러내준 사례를 광성교회와 일부 교회들이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지난해 17대 총선을 계기로 조직된 ‘기독교정당’ 역시 광성교회의 노조설립과 비슷한 평가를 받을만하다. 정치와 분리되어야 할 종교가 정치고유 영역을 침범했기 때문에 교계가 그렇게 비난했던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정당 창당을 비판했던 복음주의권 입장은 단호했다. 모름지기 교회는 하나님의 방법을 최우선으로 놓고 영적인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을 주무기로 삼았어야 했다는 것이 이들 복음주의권의 생각이었다.


이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정당 옹호자들은 정치 관계법의 호위를 받으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보수권 교회들의 몸부림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기득권을 유지시키거나 기득권을 끊거나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행동 반경 안에서 이루어질 일이지 우리들이 인위적으로 조작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게 이들이 가진 확신이었다.

따라서 최근의 광성교회 노조사태나 기독교정당 출범은 단순히 시대변화의 흐름 속에서 ‘교회도 변해야 산다’는 인기몰이식 구호로 끝날 문제가 아닌 것이다. 복음의 역동성은 어떤 조직체라도 변하게 한다는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질문이 지금 광성교회와 기독교정당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한국기독교는 전환기의 도상에 서 있다는 것이다.



위기에 빠진 전통 교회론

전환기의 도상에 있는 한국기독교를 설명하는 것 중 하나는 ‘전통교회론’에 대한 조심스런 비판 작업이다. 이 비판그룹은 전통교회론이 만들어진 배경에 주목하며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을 현대 21세기 한국의 상황에 기계적으로 적용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한다.


“비록 종교개혁자들의 모든 정의가 성경에서 그 출발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꼭 ‘성경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경적인 교회론은 선교를 전제한 상황에서 나온 것인데 반해 종교개혁자의 교회론은 사회에 주어진 상황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이 기록될 당시에는 신성 로마제국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한 것은 단지 이교국인 로마제국의 통치였던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교회는 에클레시아, 즉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사람들의 모임으로 정의한다. 죄악된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속적 은혜를 통해 특별한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모임이란 뜻이다. 이같은 교회관은 역사적으로 긍정적인 면과 함께 부정적인 면을 함께 드러냈다는 것이 비판그룹의 주장이다. 그 주장을 최대한 압축하면, 세상으로부터 부름받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계승하기 위해 피튀기는 노력 끝에 성장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왜 이것이 부정적인 면인가. 예상을 뛰어넘는 성장 때문에 부교역자와 직원이 더 필요하게 됐고, 급기야 정당을 만들어야 할 만큼 이해관계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것이다. 복음의 역동성은 약해지는 반면 교회의 시스템을 유지하려는 인위적인 관리능력과 조작능력만 강해졌다는 것이 부정적인 면으로 드러난 것이다.


고신대 전광식교수의 비판은 너무 자극적이기까지 하다.


“이제 교회는 예배를 통한 말씀의 역사와 성령의 인도하심, 영적인 교제, 성도간의 섬김이 충만한 공동체라기보다 교회당이라는 공간에서 교인들을 관리하고 그 조직을 유지하는, 말하자면 헌법과 규범, 정치과 경영논리가 득세하며 세속적 욕망과 개인적 영예가 교차하는 집단으로 변모했다.”



위기의 교회와 교회다움 회복

결국 성장한 교회가 문제였다. 이것은 성장 자체가 문제라기보다 성장을 제어할 교회가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가 성장문제를 다룰 때 꼭 되새겨야 할 점은, 교회는 ‘복음전파’와 ‘구원’을 떼어놓고서는 아무런 존재의미가 없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 성장에 우려하는 이유는 바로 구원과 무관한 성장, 즉 관리인이 많아져서 내부경영에 써야할 관심이 증대했기 때문이다. 내부경영을 위한 지침과 규율이 강화되고 대외적인 이미지조작 횟수도 증가된다는 것이다. 복음의 자유를 선포하는 교회가 도리어 속박적 기능을 보인다면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이런 맥락에서 ‘세상으로 파송받는 공동체’란 의미의 교회론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 교회론의 특징은 거룩성 보편성 일치성 사도성 가운데 ‘사도성’을 강조한 것으로, 복음의 증인 역할을 앞세운다. 이들이 열방구원과 복음적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바로 사도성에 기초한 주장들이다.


사도적 교회는 관리와 경영기법 보다 복음사역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바쁠 것이며 직장에서 복음적인 자세로 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적 직업윤리와 가정관은 어떠해야 하는지 세심하게 가르치고 훈련하는 일을 지원할 것이며 기독정치인과 경제인 등 사회지도자들을 교육시켜 파송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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