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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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 (4)
  • 공종은
  • 승인 2005.01.04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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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주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

노고단수양관 설립

1905년 설립된 소래수양관이나 1914년 설립된 원산수양관은 모두 해변에 위치하여 여름 수양관으로는 손색이 없으나 교통이나 주변 환경이 일반인들의 출입 통제를 하기엔 어려운 점이 많았다.

선교사들이 ‘여름 수양관’을 필요로 하는 근본 목적의 하나는 선교 현장 및 토착 환경으로부터 ‘차단’이었다. 토착민들로부터 ‘격리’된 공간에 가능한 한 ‘고향과 같은’ 환경을 조성하여 일정 기간 그 안에서 심신의 피로를 풀고 영성 훈련을 통한 신앙 에너지 회복을 얻기 위함이었다
.
그러기 위해서는 ‘선교사들만의’ 격리된 공간이 필요했다. 선교 사업이 확장되고 교회가 발전함에 따라 선교사들의 업무는 늘어났고 그에 따라 선교사들의 피로도 심해졌다. 격무로 건강을 잃고 별세하거나 귀국하는 선교사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1920년대 들어 남장로회 선교사들 사이에 소래와 원산에 이어 ‘제 3의’ 수양관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그 때까지 북장로회 선교사들이 주도했던 소래수양관을 주로 이용했는데 소래도 그렇지만 원산도 거리도 멀어 교통이 불편했고 무엇보다 ‘주인 의식’을 갖고 활용할 수 없는 시설들이어서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남장로회 선교사들은 자신의 선교 구역 안에서 새로운 수양관을 설립할 후보지를 찾던 중 지리산을 주목했다. 전라도 해안에도 해수욕장이 많이 있었지만 원산이나 소래의 경우에서 보듯 해변 수양관은 일반인 통제가 어려운 점을 감안해 지리산을 택한 것이다. 그것도 전문 등반가가 아니면 자주 찾지 않는 노고단 정상 부근에 수양관을 조성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자료 부족으로 정확하게 언제부터, 누가 지리산 수양관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21년 6월 전주에서 개최된 남장로회 한국 선교부 30차 연례회의에 ‘지리산 임시위원회’ 보고서가 제출된 것을 보아 적어도 1920년 이전에 지리산수양관 설립이 모색됐음을 알 수 있다.

지리산 수양관 설립 문제는 이미 1920년 이전에 제기되어 1920년 연례회에서 ‘지리산 임시위원회’가 조직됐으며 1921년 연례회의에서 당시 전주에서 활동하던 남장로회 선교사 윈이 지리산수양관 설립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보고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년 후, 1922년 6월 광주에서 열린 31차 연례회의에서 지리산위원회는 한층 진전된 내용을 보고했다.

1922년 연례회의는 지리산위원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지리산에 임시수양관을 설립할 것과 6인 특별위원회(위원장 스와인하트)를 만들어 지리산수양관을 건설할 부지의 소유권자인 도쿄 제국대학과 토지 사용에 관해 협상하도록 결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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