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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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기독교 유적지의 역사와 의미(2)
  • 공종은
  • 승인 2005.01.0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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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주교수/감신대 한국교회사

소래수양관
소래수양관은 유명한 소래교회가 있었던 황해도 송천리 해변에 있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와 옹진반도를 지나 구미포를 통해 가는 길이 편한데, 백령도에서 뱃길로 70리 떨어진 곳이다. 1882년 만주에서 로스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은 후 매서인이 되어 한글 성경을 갖고 들어온 서상륜이 1883년 무렵 그 동생 서경조와 함께 이곳 소래에 정착해 복음을 전한 결과 자생적 신앙공동체가 형성됐고 이곳 신도 3명이 1887년 봄 서울 정동에 자리 잡은 북장로회 선교사 언더우드를 찾아가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가을 언더우드는 소래를 방문해 7명에게 세례를 베풀어 소래는 ‘한국 개신교 요람’으로 불리게 됐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 소래 교인들의 우호적인 환영과 적극적인 지원 분위기 속에서 어학훈련을 받았고, 한국 토착 교회와 토착 문화를 접하면서 한국 선교를 준비했다. 이런 소래에 선교사들의 ‘여름 수양관’을 만들 생각을 처음 한 인물이 언더우드다. 언더우드는 1887년 가을, 소래를 처음 방문했을 때부터 ‘여름 별장’ 건립 후보지로 생각했고, 1900년 부지를 마련한 후 1905년 여름에 처음으로 언더우드 가족과 쿤스, 허스트 등이 휴가를 그곳에서 보냈다. 언더우드가 같은 선교부의 쿤스와 허스트를 소래로 데려 간 것은 소래를 언더우드의 개인 별장이 아닌, 선교사들의 공동 수양관으로 발전시키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래수양관은 선교사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기에 충분했다. 언더우드 가족과 쿤스, 허스트 등이 시작한 소래수양관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났다. 언더우드 부자를 포함,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가 16가정으로 제일 많았고,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가 둘, 미감리회 소속 선교사 4가족이 참여해 처음부터 ‘초교파적’ 수양관으로 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 중 언더우드와 벙커, 허스트, 할버트, 쿤스 등으로 관리위원회를 조직했으며 쿤스는 서기, 허스트는 회계를 맡아 수양관 운영 실무를 맡았다.

한일합병 이후 수양관 부지는 언더우드가 토착인 지주들로부터 199년 동안 사용하기로 임차계약을 맺고 사용료를 지불한 후 그의 이름으로 등기를 했는데, 이는 총독부 간섭과 통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언더우드는 수양관 사업에 관심이 있는 토착 지주들을 포함, 7~10명으로 ‘소래수양관회사’를 설립했고, 동시에 ‘임대 분양’에 참여한 선교사들로 ‘소래수양관임대협회’를 조직해 운영과 관리에 대한 상호보완 관계를 가지도록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임대협회가 실질적인 권한을 갖고 수양관을 운영하게 됐다.

이로써 수래수양관이 틀을 잡고 분양사업을 시작했다.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했던 구미포 포구 언덕을 경계로 수양관이 자리잡은 서쪽 해변은 백사장과 소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와 차단된 은밀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이런 곳에 고향과 같은 환경을 만들기 시작했다. 1910년 인천에서 출발해 구미포까지 왕복하는 여객선 운행이 시작됐고, 그해 여름 선교사 20명이 소래에서 휴가를 보낸 것을 계기로 소래수양관 분양에 참여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났다.

1913년 ‘양관’ 건물 세 채를 지었고 외국인 생활용품을 수입해 판매하던 미국의 스튜어트상사가 소래에 영업소를 개설해 외국인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이곳을 찾는 선교사들이 더욱 늘어났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양관과 부대시설도 늘어나 1920년대 들어 작은 주택이 50채 이상이 늘어섰고, 3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강당과 도서실, 빵공장, 일용잡화점, 진료소는 물론이고 수양관 업무를 돕는 한국인 직원 숙소도 마련했다.

선교사들 사이에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이라고까지 불렸던 소래수양관은 일제시대 인기있는 여름 수양관으로 활용됐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접어들면서 총독부와 선교사 관계가 악화돼 1940년 11월 선교사들이 대거 귀국한 후 소래수양관은 폐쇄됐고, 태평양 전쟁이 터진 1941년 이후에는 ‘적산’(敵産)으로 구분돼 선교부나 교회가 간여할 수 없는 곳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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