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은 새 희망의 땅, 꿈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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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은 새 희망의 땅, 꿈을 위해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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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1.03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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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 르포 새 희망을 꿈꾸는 사람들

목숨 걸고 남한으로 건너온 탈북 가족 김성철씨네 새해 소망



날씨가 점점 더 추워지고 있다. 겨울이 추운건 당연한 이치지만, 갈 곳 없는 노숙자들에겐 추운 날씨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이는 비단 노숙자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배고픔을 못이겨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어온 탈북자들에게도 겨울은 춥기만 하다. 생김새는 같지만 나와 다른 말투, 사상, 자신을 향한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도 추위만큼이나 견디기 어렵다.

나라에서 탈북자들에게 얼마쯤 정착 지원금이 나오지만 생계에 필요한 물품을 사고 직장을 얻기까지 그 돈으로 보텨야만 한다. 그나마도 사기를 당하거나 한국행을 도와준 중개인에게 뺏기는 일이 태반이다. 아무런 연고도 없이 무일푼이 된 이들이 갈 곳은 추운 길거리 뿐. 목숨을 걸고 남한행을 감행했지만, 이곳에서조차도 이들은 이방인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 다시 중국에서 북한으로 끌려가기를 여러차례. 비록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몇 년동안 떨어져 있던 누나와 어머니를 만나 세가족이 함께 살게 된 김성철(23세)씨는 요즘 새 생명을 얻은 기분이다.


우리는 행복한 가족입니다


“요즘 참 살 맛 납니다.”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난 김성철씨는 한국에 들어온지 겨우 1년이지만, 북한 특유의 말투가 조금씩 배어나는 것을 빼고는 완전한 한국사람이었다. 김씨는 현재 어머니, 누나와 함께 국가에서 마련해준 부평의 한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요즘 공부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사는 김성철씨는 말하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다.

“원래는 공부에 별 취미가 없어서 어릴적부터 사회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근데, 한국에 와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조언을 많이 받고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근데, 성격이 급해서 빨리 따라잡고 싶은 마음에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김씨는 중학교 검정고시에 두 번 떨어진 경험이 있지만, 오는 4월에 있을 3차에서는 반드시 붙겠다는 각오로 아침, 저녁으로 두 개의 학원을 다니고 있다. 아직 특별히 진로를 정하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학문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배울 수 있어 적응하는데도 큰 도움이 됐다는 게 그의 말이다.

“신학대학에서 기도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대뜸 묻던 그는 처음 한국에 들어와 목회자가 되길 꿈꿨다. 목사가 돼서 불쌍한 사람들을 많이 돕고 싶고, 봉사하며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목회자가 되려면 일단 배워야한다는 걸 알게 됐고, 지금은 일단 올해 안에 중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고 대학에 가는 게 그의 목표이다.

이런 김씨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그보다 3살 위인 누나이다. 서강대 신방과 05학번이 된 성철씨의 누나는 러시아어, 중국어, 영어 등 외국어에서부터 수영, 인라인스케이트 까지 못하는게 없다. 북한을 떠나 중국의 친척집에서 생활하던 그녀는 중국어를 배워 화장품 회사에 취직했다. 제법 수입이 있어 따로 집을 얻어 살며 비교적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2002년 한 목사님을 만나 세례를 받으면서 한국으로 넘어오게 됐다.

“처음 국가에서 마련해준 집에 들어갔는데, 세상에 혼자 남겨진 막막한 기분이었어요. 아무것도 없는데 당장 어디 가서 생필품을 사야할지, 물건은 제대로 사고 있는 것인지 비교의 척도가 없으니 어떻게 해야할지 그때가 제일 막막했어요.”

그러나 암울한 표정도 잠시, 그녀는 금새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한국에 오게 된것도, 국가에서 내 준 집도, 지원금도 모두 감사하다고 말하는 그녀.


남북의 문화 차이 알리고파


북한의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했던 그녀는 어느정도 생활이 정리가 되자 한국에서 태어난 친구들의 교육에 대해 궁금했다. 낯선 땅에 대한 호기심은 하루 중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공부에만 매달리게 했다. 성철씨의 누나 역시 특별한 직업선택을 위한 공부보다는 한국사회에 대해 융화되고, 남북의 차이를 알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녀는 신방과를 졸업하고 칼럼리스트로 활동하면서 남북의 문화를 다 경험한 중도자의 입장에서 서로를 알리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여행을 너무 좋아해 한국에 와서도 제일 먼저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을 정도인 그녀는 대학에 합격한 요즘 너무 바빠 가족들 얼굴 보기조차도 너무 힘들다. 여느 또래들처럼 친구들과 만나 수다도 떨고, 수영장, 서점, 영화관, 연말 모임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게다가 탈북자들이 모여 만드는 ‘새동네 신문’ 등 여기저기서 함께 일해 보자는 행복한 러브콜까지 받고 있다. 아직은 배워야 할 것이 너무 많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래도 어려운 여건속에서 북한을 알리는 이들을 조금이나마 돕고 싶어했다. 뭐든 궁금하고 배우지 않고서는 못 버티는 이들 남매의 이러한 열성은 모두 어머니(54세)에게서 물려받은 것.


기술을 익히는 것이 먼저


당장 먹고 사는 것에 급급해 무작정 직장을 구하기보단 제대로 된 기술 하나라도 익혀서 취업을 하고 싶다는 김씨의 어머니도 아침 9시부터 오후 늦게까지 재봉기술을 배우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기쁜 엄마입니다. 통일부에서 탈북자들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하나원을 나와 생활한 지 6개월밖에 안됐지만, 스트레스 받을 일도 없고 사는 데 큰 불편함도 없습니다.”

한국에 정착하는데 불편하거나 어려웠던 점은 없었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다 똑같은 사람사는 곳에 어려울 게 무엇이냐고 오히려 반문을 한다.

“엄마, 아빠가 다 다르니 사람이 다를 수밖에요,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고생스러웠던 걸 생각해서라도 좀 더 열성스럽게 노력하고, 모르면 상대방에게 물어보면 되는 거지.”


이 모든 것 하나님 축복


처음엔 가족이 모두 집 앞 화평교회(이종학목사)에 다녔지만, 성철씨 어머니는 지금 서울영락교회(이철신목사)를 섬기고 있다. 교회 봉사모임에서부터 탈북자 모임까지 절대 빠지지 않고 바쁘게 활동하는 그녀는 새벽기도도 결코 빠지는 일이 없다.

“새해 소망이요? 그저 우리 딸 희망하는 일 잘되고, 아들도 공부 열심히 해서 원하는 일 할 수 있게 되는 것 밖에는 없어요. 이렇게 살게 된 것만으로도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요.”

크리스마스 이브 성철씨의 여자친구까지 모여 저녁준비를 한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가족 모두가 나와 배웅을 한다. 밥 한끼 못먹여 보내는 아쉬움에 한껏 포옹까지 해주는 어머니는 그저 시골에 계신 어머니 같았다. 

“또 놀러와요. 꼭 한번 놀러와. 그래 1월 1일이 내 생일이니까 그때 와서 꼭 밥 한끼 같이 먹어요.”


여러차례 다짐을 받고 돌아서는 어머니 옆에 나란히 팔장을 끼고 들어가는 김성철씨 가족의 모습에서 밝은 2005년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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