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까지 조선인을 위해 살다간 청년 의료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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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조선인을 위해 살다간 청년 의료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9.1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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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㉑ 제물포의 약대인(藥大人) ‘엘리 바 랜디스’

장로교, 감리교에 이어 3번째로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은 영국 성공회였다. 성공회는 현재 전 세계 약 1억명 이상 교인이 속한 기독교 공동체로, 우리나라에서 ‘사제’, ‘신부’와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톨릭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신교 교단으로 세계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 ‘존 스토트’, 예수원 설립자 故 ‘대천덕’도 성공회 소속 목회자였다.

조선에 최초로 파송된 성공회 선교사는 찰스 존 코프(고요한)로, 함께 파송된 6명의 선교단원 중 엘리 바 랜디스(Eli Barr Landis, 1865~1898년, 한국명:남득시) 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조선의 약자들을 돌보고 치료하는데 헌신적이었던 랜디스는 32살 나이에 갑자기 주님 품에 안겼다. 사역 기간이 비교적 짧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섬김과 복음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렬했다. 

7명의 조선 파송 선교사 
조선의 선교 문호가 개방될 것 같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884년 영국 성공회는 선교사 파송을 고심한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성공회 사역자 울프가 부산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첫 선교사는 1889년 11월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조선교구장으로 서품을 받은 찰스 존 코프였다. 해군 군종신부로 인도, 중국에서 사역했던 그는 1843년생으로 만 45세 되던 1890년 제물포항으로 입항했다.

입항 당시 코프는 혼자가 아니었다. 당시 6명의 선교단원이 함께 입국했는데, 영국에서 퇴역한 군의관 와일스(Julius Wiles), 간호 교육을 받은 2명의 수녀, 중앙아프리카에서 온 22살 평신도 청년, 한국 성공회 2대 주교가 된 마크 트롤로프가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명은 청년 의사 엘리 바 랜디스였다. 

랜디스는 1865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6형제 중 5번째로 태어나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하다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의대에 다니던 중 미국 내 영국 성공회 소속의 사역자를 만나면서 성공회 교인이 된다. 1888년에는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로 활동을 시작한 랜디스는 불과 1년 만에 선교사로 살기로 결심한다.

비슷한 시기 영국 성공회에서는 코프와 함께 조선으로 파견할 사역자를 찾고 있었지만, 적임자를 찾기 쉽지 않았다. 선교단 규모를 정했지만, 사역 재정마저 충분하지 않아 고생길이 훤해 지원자가 없었던 것이다. 62세나 된 퇴역 군의관 와일스는 2년 동안만 사역이 예정되어 있던 상황에서, 청년의사 랜디스가 자원한 것은 은혜였다.

코프 주교는 조선으로 오기 전 미국에서 랜디스를 만나 소통하기도 했다. 랜디스는 아시아와 조선에 대한 자료를 확보해 이미 공부하고 있었다. 이렇게 코프 주교와 떠날 선교단원이 확정됐고, 캐나다 벤쿠버를 떠나 일본 요코하마와 고베, 부산을 거쳐 1890년 9월 29일 제물포항에 당도한다. 

성공회 선교단원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년의사 랜디스는 자신의 몸을 돌볼 여력도 없이 헌신적으로 사역하다 32세에 주님 품에 안겼다. 

존경받을 정도의 헌신
랜디스는 코프 주교를 도와 제물포와 서울, 강화도 등지를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고 병원을 건립하는 데 기여했다. 환자 진료는 조선에 도착한지 불과 보름이 채 되지 않아 시작됐다. 영국영사관 부영사의 도움으로 마련한 제물포의 집으로 환자들이 찾아왔고, 진료 도구나 약품이 부족했지만 당장 치료부터 나선 랜디스였다. 응봉산 꼭대기 인근에 성누가병원이 설립되었고, 그는 환자를 돌보면서 틈틈이 조선말을 익히는 데 열심이었다. 제물포는 개항지였지만 외국인들조차 의료 혜택을 받기 어려웠다. 그 만큼 서구 의술을 익힌 랜디스는 반가운 존재였다. 환자들은 대부분 남자들이었고, 때로는 조선 사람들의 집에 왕진을 가기도 했다. 

코프 주교는 서울과 제물포를 오가는 사역 일정이 많았다. 그 사이 랜디스는 제물포에서 환자를 돌보는 데 열중했다. 랜디스가 서울을 처음 방문한 것은 이듬해 3월에서야 가능할 정도로 치료에 헌신적이었다. 그마저도 단 2일 서울에 머물고 다시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제물포로 돌아왔다. 환자 치료를 하면서도 조계지 내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주 6일이나 영어강좌를 운영하기까지 했다. 코프 주교가 만주지방까지 관할하게 되면서 제물포에서 랜디스가 져야 할 부담은 더 많아졌다. 병원 진료 외에도 교회 건축, 병원 건립과 같이 챙겨야 할 사역의 종류도 다양했다.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누구보다 바쁜 사역 일정을 소화하던 코프마저 랜디스가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인정할 정도로 그는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는 사역자였다. 

1891년에는 병원다운 건물을 완공하고 성누가병원 문을 열었다. 외국인에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조계지가 아니라 조선인 주거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랜디스는 조선 사람들에게 낯선 ‘성누가병원’ 대신 ‘낙선시의원(樂善施醫院)’이라는 간판을 내걸며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성공회 사역자 중 랜디스는 조선말과 풍습, 문화에 대해서 가장 뛰어난 실력자였다. 심지어 한자까지 익히게 되었고, 서양인들에게 어렵다는 가부좌 자세로 환자를 진료할 정도로 우리 생활환경에 익숙해져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약을 다루는 큰 사람이라는 약대인(藥大人)이라 부르며 존경했다. 

“십자가를 옆에 놓아주세요”
제물포는 조선의 문호였던 만큼 랜디스는 입국하는 외국인들을 도와야 할 때가 많았다. 거절하지 못하고 서울까지 도보로 안내할 때도 많았을 터. 환자를 돌보는 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1892년 한 해 동안 진료한 환자만도 3천3백명이 넘었다. 1894년 청일전쟁 때는 부상병들을 돌보기도 했다. 소문이 나면서 경기도 일대를 비롯해 전국에서 찾아오는 환자들도 늘어났다. 1895년 여름에는 콜레라까지 발생했을 때에도 최선을 다했다.

랜디스는 조선에 입국한 지 5년 만에 휴가를 얻는다. 조선 선교사역을 위해 약정된 시기는 1895년으로 만료되었지만, 3년을 더 사역하기로 결단한다. 잠시 휴가로 비게 된 자리를 위해 코프 주교는 중국에서 사역하던 영국계 캐나다 의사 플러턴 보이드 말콤을 불렀다. 

랜디스는 영국과 미국에서 6개월 휴가를 보내면서도 그가 맡고 있던 고아원 아이들에 대한 걱정들이 앞섰다. 이미 제물포를 떠나면서부터 제물포를 그리워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랜디스는 서울의 성공회 병원 사역을 잠시 맡게 된다. 서울 정동에서도 돌보던 고아들을 데리고 살았다. 그런데 1897년 새해 제물포 병원을 책임지고 있던 말콤이 장티푸스에 걸린 몸을 이끌고 환자를 돌보다 새벽녘 혼자 쓸쓸하게 사망하는 일이 생겼다. 

결국 랜디스는 다시 돌아와서는 자신의 새로운 거처를 조선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정했다. 제물포의 심각한 위생환경을 지적하곤 했던 그였지만, 조계지에서 안전한 삶을 포기했다. 안타깝게도 랜디스도 1898년 3월말 장티푸스에 걸렸고, 친구처럼 지내던 트롤로프 사제는 제물포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군 군함에서 군의관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상태가 악화되어 갔다. 정말 심각한 상황에 빠졌을 때에는 인근에 마땅한 의사가 없었다. 급하게 의사를 데리러 서울로 떠났지만, 의사가 왔을 때는 이미 가망이 없었다. 임종을 앞둔 랜디스는 자신의 십자가를 곁에 놓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1898년 4월 16일 오후 숨을 거두었다. 32세 나이로 랜디스가 떠나자 1901년 성누가병원은 자원하는 의사가 없이 문을 닫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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