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잘거리던 소리도, 작은 손의 입맞춤도 없어져 외롭고 힘들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이를 데려가셨다.”
1890년 25살 나이에 미국 북감리교 파송을 받아 의사이자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한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 1865~1951)은 결혼 1년 5개월 만에 함께 사역하던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을 잃었다. 엄청난 슬픔이었지만 뱃속에 품고 있던 딸 ‘에디스’가 태어나 큰 위로가 되었다. 위로도 잠시, 한참 귀엽고 상냥하게 자라던 에디스마저 주님 품으로 보내야 했다. “하나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아기를 데려가셨다”고 고백한 로제타 홀은 엄청난 비극 속에서도 사명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남편을 이어 평양에서 사역하며 43년 동안 환자를 돌보고 복음을 전했다. 무엇보다 ‘평양의 오마니’로 불리며 조선의 여인들을 위해 살았던 로제타 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조선으로 파송된 의사 부부
올해 4월 대한민국 정부는 제45회 보건의 날을 맞아 한 외국인 여성선교사를 기억하고,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무려 43년 간 선교사로 살면서, 우리나라 보건의료 발전에 크게 공헌했던 로제타 홀의 생애를 조명하고 감사의 뜻을 전하는 자리였다. 국민훈장 모란장은 로제타 홀이 안장되어 있는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보관하기로 했다. 묘원에는 남편 윌리엄 제임스 홀과 딸 에디스 마가렛 홀도 함께 묻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제타 홀은 미국 뉴욕에서 태어나 세계 최초의 여성들을 위해 설립된 펜실베니아 여자의과대학을 졸업했다. 인턴으로 뉴욕 빈민가에서 의료 봉사활동을 하던 중 남편을 만나 약혼했지만, 선교사로 살기로 했던 서약대로 1890년 10월 내한한다. 의료선교사로서 중국으로 파송되길 원했던 제임스도 이듬해 약혼자를 따라 조선을 찾게 됐고, 두 사람은 1892년 6월 결혼했다.
갓 신혼여행을 마치고 결혼 2주 만에 남편 제임스 홀은 원하던 대로 평양 개척선교사로 임명받아 떠났다. 주민들의 경계와 지방 관리들의 방해가 심각했지만 제임스 홀의 헌신적인 의료사역은 평양을 감동시켰다. 돌팔매질까지 하던 평양 사람들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같은 기간 로제타 홀은 여성환자들을 위한 서울 보구녀관(保救女館)에서 엄청난 수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여파로 평양에서 잠시 철수했던 제임스 홀은 이내 평양으로 돌아온다. 밤낮으로 폐허 속에서 환자를 돌보고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결국 과로로 인해 면역력이 약해진 탓인지, 발진티푸스에 걸려 사망한다. 짧은 사역이었지만 목숨까지 내어놓을 정도로 헌신적인 제임스 홀의 사역이 있었기에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자녀를 먼저 떠나보낸 슬픔
남편이 떠나자 로제타 홀에게는 갓 돌이 지난 아들 셔우드 홀만 남았다. 감사하게도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자라고 있었고, 로제타 홀은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으로 잠시 돌아가 딸 에디스를 출산했다. 미국에 머물면서도 조선 선교에 열심이었다. 남편의 헌신적인 사역을 기억하며 평양에 병원(기홀기념병원) 건립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하고, 남편의 전기까지 집필했다. 미국에 머문 지 2년 후 로제타 홀은 두 자녀와 함께 다시 조선으로 향한다. 사역지는 남편이 개척한 평양이었다.
안타깝게도 1898년 5월 1일 평양에 도착한 세 가족은 모두 이질에 걸리고 만다. 로제타와 아들 셔우드 홀은 다행히 회복했지만, 가장 어린 에디스가 23일만에 엄마 품에서 천국으로 향한게 된다.
로제타 홀은 두 아이를 키우며 육아일기를 집필했다. 일기 안에는 에디스의 진료기록과 개인적인 고통과 슬픔이 있는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에디스가 삐뚤삐뚤 썼던 한글 자모가 오려서 붙여져 있어 마음을 더욱 애잔하게 만든다.
“체온 41도, 숨이 가쁘고 힘들어했다. 에디스를 팔에 안고 낮잠 재울 때처럼 흔들어 주었다. 얼굴은 평화스러워졌고 호흡의 간격도 길어졌다. 크게 뜬 눈으로 엄마를 보면서 이 작은 영혼은 떠나갔다. 오후 8시 40분 에디스는 세상에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다.”
최초의 역사 써내려간 로제타
사랑하는 남편, 내 목숨보다 소중한 딸을 떠나보낸 여린 여인의 고통은 엄청났지만, 조선의 약자들을 위한 사역은 강철처럼 단단했다. 특히 로제타 홀은 이름조차 없이 비극적으로 살아야 했던 대부분의 조선 여인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선교 초기 로제타 홀은 보구녀관에서 진료를 보았고, 한 여자아이를 만나게 된다. 아이의 이름은 김점동, 훗날 조선 최초의 양의가 된 박에스더이다. 로제타 홀은 이화학당 4번째 학생 점동이에게 새 삶을 열어주었다. 남편 박유산과 연결해 결혼을 시켜주었고, 제임스 홀을 떠나보낸 후 미국으로 갈 땐 부부도 데려 갔다. 미국에서 공립학교와 의과대학을 졸업하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박에스더는 선교사 조선으로 파송까지 받게 되었다. 귀국 후 박에스더 역시 평양에서 헌신적으로 환자들을 돌보았다. 안타깝게도 1910년 34살 나이에 결핵으로 사망한다.
로제타 홀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조선 여성들의 삶을 바꾸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 몸부림쳤다. 1898년에는 평양에 기홀병원과 함께 여성 환자들을 위한 ‘광혜여원’을 개원한다. 1903년에는 광혜여원 내에 여성의학강습반을 만들어 여성의사 후보생을 키웠다. 여의사 후보생들을 세브란스의전에 보내고 싶어 했지만, 선교사들이 설립한 그곳에서조차 여학생을 받지 않았다. 뿌리깊은 남녀 차별 속에 경성의전에서 청강을 허락하면서 1918년 3명의 여의사를 배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6년 경성의전이 청강마저 불허하자 로제타는 1928년에는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만들었다. 강습소는 훗날 수도여자의과대학이 되었고, 이후 고려대학교가 인수하면서 현재 고려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했다.
로제타 홀은 광혜여원에서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을 시작했다. 190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아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뉴욕 빈민가에서 자원봉사 할 당시 점자를 익혔던 로제타 홀은 조선 사람들을 위한 평양점자를 개발하고, 최초의 점자교과서, 점자성경까지 펴냈다.
결국 시간은 흘러 로제타 홀도 건강이 좋지 않게 되었고 1933년 선교사 사역을 마감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 1951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어머니 로제타의 하나 뿐인 아들 셔우드 홀은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아내와 함께 귀국해 어머니의 선교사역을 계승하며 의술을 펼쳤다. 특히 셔우드 홀은 이모처럼 따랐던 박에스더가 결핵으로 사망한 것을 기억하며, 우리나라 최초의 결핵요양병원 해주구세병원을 설립하고 결핵 퇴치를 위한 크리스마스실도 처음 발행했다. 셔우드 홀은 1940년 일제에 의해 추방될 때까지 부모의 헌신적인 삶을 기억하며 조선 사람들을 돌보고 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