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절했다. 조선은 내가 전혀 모르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란이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토요일 밤에 받은 조선으로 가달라는 요청을 거절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 나의 ‘아니오’를 ‘예’로 바꾸었다. 그다음 월요일 나는 조선으로 향했다.”
하나님의 뜻은 종종 우리의 계획과 생각을 벗어난다. 이란에 의료선교사로 가려 했던 애니 앨리스를 하나님은 조선으로 보내셨다. 게다가 의료선교에 더해 ‘정신여학교’를 설립하는 교육선교까지 하게 하셨으니 말이다.
의과대학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애니는 모든 계획을 바꾸고 1886년 조선으로 왔다. 도착하자마자 명성황후의 주치의가 됐으며 제중원에서 양반 가문의 여성들을 치료했다. 이에 고종은 정동에 집을 하사했다.
제중원에서 일하던 애니는 같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자신의 집에서 고아들을 모아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된다. 조선의 남녀유별의 규범 때문에 언더우드가 남아만을 거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게 돼 자신은 여자 고아를 돌보기로 마음먹는다.
1887년 6월 고종에게 받은 정동 28번지 주택을 ‘정동여학당’이라 이름 붙이고 ‘정례’라는 다섯 살짜리 고아를 데려왔다. 이후 돌보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1895년 10월 20일 연지동으로 이전하며 ‘연동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지금도 후신인 정신여고와 정신여중은 10월 20일을 개교기념일로 지킨다. 1907년 제1회 졸업생 11명을 배출했으며, 1909년 이름을 정신여학교로 바꾸면서 정식학교로 인가받았다.
정신여학교가 여타 선교사 설립학교와 다른 특징은 영어를 교육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조선의 여성을 조선의 기독교인으로 키운다’는 교육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과목은 한국어로 가르쳤고, 과목 중 ‘언문’도 있었다. 또한, 정신여학교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바느질’과 ‘역사’였다. 바느질의 경우 근대적 교육도 중요하지만, 당시 조선 사회에서 여성으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판단해 강조했다. 역사는 정신여학교가 가장 공들였던 과목으로 학생들의 민족적 정체성 확립에 힘썼다. 경술국치 이후 한국사를 가르칠 수 없는 상황에서 서양사 시간에 한국사를 가르칠 정도였다.
이런 역사 교육은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심어줬다. 정신여학교 학생들인 3.1운동, 신사참배 거부 등 일제에 저항했고 결국 1939년 폐교됐다가 1947년 해방 이후 졸업생 김필례에 의해 재개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