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이 달라진다. 100년이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기술의 발전과 인식의 변화, 문화의 확장은 정치·경제 전반은 물론 우리의 일상까지도 뒤바꿔놨다. 교회와 선교도 예외는 아니다. 약 2천년 전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전해졌던 복음은 마차와 범선, 기차와 비행기에 몸을 싣더니 이제는 전 세계에 연결된 인터넷망을 타고 단 몇초만에 전달된다.
달라진 세상에서 교회의 모습과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2천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국제 로잔운동은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현실과 그에 맞는 선교 전략을 고민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The State of the Great Commission Report)’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의 선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작성한 보고서는 10가지 질문을 통해 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그에 맞춘 대안을 제시한다. 본지는 이번 호부터 10회에 걸쳐 로잔운동이 고민한 10가지 질문의 포장을 풀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타향살이가 벌써 10년을 훌쩍 넘었다. 집안의 집기와 가구, 모든 생활용품은 이미 혼자 사는 삶에 최적화된 지 오래다. 인구 천만이 밀집한 수도 서울에는 기자와 같이 ‘고향, 친척, 아비집’을 떠난 ‘유목민’들로 가득하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 대대로 이어온 터전에 자리 잡고 일가를 이루는 삶은 진작에 옛말이 됐다.
바야흐로 이주의 시대다. 구태여 다민족 국가인 미국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아도 당장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이주민 인구만 250만명에 이른다. 공식 집계되지 않은 불법체류자까지 포함한다면 300만명은 훌쩍 넘을 것으로 추측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계는 더 좁아지고 한 국가의 구성원은 더욱 다양해지리라는 전망이다.
그 옛날 목초지를 찾아 떠돌던 유목민처럼 평생 거주할 집을 정해놓고 살지 않는 이 시대의 우리는 모두가 ‘유목민’이다. 21세기 유목민에게는 ‘집’의 의미도, ‘이웃’의 의미도, ‘공동체’의 의미도 예전과 같지는 않다. 로잔운동은 ‘공동체란 무엇인가’(What is Community?)라는 질문을 던지며 달라진 공동체의 의미를 재탐색하고 이주민과 난민, 유학생을 향한 선교적 관심을 촉구한다.
지구촌은 모두 ‘이사 중’
이주는 전 세계적 흐름이다. 사실상 대부분의 국가에서 국제 이주민의 수가 증가했고 특히 유럽과 아시아, 북미는 이주민들의 주요 목적지로 손꼽힌다. 가장 많은 이주민을 받고 있는 나라는 미국으로 다른 상위권 국가와 비교해도 약 5배에 달한다. 독일과 사우디아라비아가 그 뒤를 이은 2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주민을 가장 많이 내보내는 나라로는 인도, 멕시코, 러시아, 중국이 차트에 올랐다.
재난을 피해 도망치는 이주민들의 모습이 주로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대부분의 이주는 사실 중산층들의 경제적 이유로 인해 이뤄진다.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가난한 이들은 오히려 거의 이주하지 않는다. 국제 이주 자체가 상당한 재정을 필요로 하는 탓이다. 전쟁과 같은 위험한 상황이 터져도 자국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주, 즉 난민의 수는 2010년 이후 눈에 띄게 증가했다. 각국에서 반복되고 있는 불안정한 정세,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등지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영향이 크다. 지난해 시리아에서만 약 680만명의 난민이 안전한 삶을 갈구하며 해외로 떠났고 베네수엘라에선 460만명, 아프가니스탄에선 270만명, 남수단에선 24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가장 난민을 많이 수용한 국가는 튀르키예로 380만명의 난민이 머물고 있다. 콜롬비아(180만명), 우간다(150만명), 파키스탄(150만명)에도 적잖은 수의 난민이 존재한다.
난민의 수는 이주민 전체의 인구에 대비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교회의 핵심 사역 대상으로 지목된다. 인도적 차원에서 고난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성경적인 환대를 펼쳐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난민들의 모국에서는 기독교를 접할 수 없는 상황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놓칠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유학생 역시 늘어나는 추세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잠시 주춤했지만 최근 다시 추진력을 회복한 모양새다. 유학생을 많이 받는 국가는 단연 미국이 압도적인 가운데 영국과 호주, 독일이 그 뒤를 잇는다. 유학생을 보내는 국가는 주로 아시아 국가인 반면 유학생을 받는 국가는 북미와 유럽 등 서구권이 대다수다. 유학 생활을 통해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도 많기에 캠퍼스 유학생 사역의 중요성도 높아지고 있다.
잠재적 선교사인 디아스포라
문명의 새벽부터 인류는 이주해왔다. 누군가는 푸른 목초지를 찾아, 누군가는 생계를 위해, 또는 안전을 위해, 일자리와 교육을 위해 이동을 반복한다. 유목시대와 오늘날의 차이점이 있다면 이주의 범위가 전 지구로 넓혀졌다는 사실 뿐일 것이다.
유엔의 국제이주기구(IOM)가 발행하는 세계 이주 보고서(WMR)는 2020년 전 세계에 2억8천만명의 국제 이주민이 있었다고 추정한다. 이는 전 세계 인구의 3.6%에 해당하는 수치다. 앞으로 30년 동안 이주하는 사람들의 수가 지난 3세기 동안 이주한 사람의 수보다 많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그렇다면 ‘글로벌 이주’라는 주제는 선교와 어떻게 연결될까. 선교적 관점에서 보면 이주는 ‘모든 열방을 향한 모든 성도의 선교’를 성취하는 일이다. 이주가 활발하지 않았을 당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소수의 선교사만이 비행기와 배에 몸을 실었다면 이제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며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크리스천 모두를 잠재적 선교사라 볼 수 있다.
이와 동시에 이주는 모든 국가, 모든 장소를 선교지로 만들었다. 이슬람 국가, 또는 공산권 국가에서 자라 한 번도 제대로 복음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이웃으로 다가온 이상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이 바로 선교지가 된다. 전통적 선교가 지리적 경계로 설명됐다면 이 시대의 선교는 국가적 경계를 넘어 모든 장소에 초점을 맞춘다.
디아스포라를 향한 선교 패러다임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는 우리에게 가까이 온 미전도 종족들에게 다가가고 선교를 실천하는 방법이다. 이주한 사람들은 대부분 복음에 열려 있고 신앙을 바꾸는 데 사회문화적 장애가 없다. 그들은 나고 자란 곳에서 물려받은 신앙을 기독교 신앙과 비교하고 대조하며 복음에 더 가까워진다. 로잔운동은 이들이 더 복음에 마음이 열리도록 기독교적 환대와 자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두 번째 패러다임은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통한 선교다. 모든 선교사는 곧 이주민인 것처럼 모든 이주민 기독교인들은 선교사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땅 끝까지’ 가는 일에 더 마음이 열려 있으며 어디서든 기독교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형성한다. 전 세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 한인교회가 그 예다.
셋째로 디아스포라 너머의 선교를 고민해야 한다. 디아스포라 기독교인들은 이주한 지역의 구성원들에게 다가가고 본국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들은 여러 세계에서 다양 경험을 보유한 교차문화적 다리이며 다른 환경과 네트워크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송된 선교사다. 이들이 보유한 영적 활력과 통찰력은 그 사회와 교회에 귀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도시의 다음세대와 여성을 주목하라
이제 세계의 대부분은 도시화됐다. 2050년이면 전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도시에 살게 된다. 특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도시화와 인구증가는 가속이 붙을 것으로 예상된다. 로잔운동은 특히 남아시아의 도시 선교 운동에서 여성의 중요성을 주목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급증하고 있는 남아시아에서는 교회가 여성과 아동을 위한 안전한 울타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남인도의 첸나이 지역은 약 6천개의 교회가 있지만 교회 내 여성 중 56%가 어떤 형태이든 학대를 당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그리고 그중 단 17%만이 교회가 자신을 도왔다고 느꼈다.
인도의 신학 연구 및 커뮤니케이션 연구소는 가정 폭력에 대해 조사하면서 교회 안의 여성들이 교회 밖의 여성들보다 학대에 더 침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이는 교회에서 여성들에게 침묵할 것을 가르치는 제자 양성 방식에 기인했을 것으로 연구소는 분석했다. 여성들이 학대로부터의 피난처로 교회를 바라볼 수 있도록 체질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접근하는 전략도 마련돼야 한다. 도시에서 다음세대를 향한 복음의 영향력이 커지기 위해서는 교회와 비영리단체, 크리스천 비즈니스 리더, 그리고 이에 공감하는 시민 사회 리더들의 연합이 필요하다. 다음세대를 교회에 초대하고 대위임령에 대처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