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만큼 중요한 자유와 교양을 전해준 최초의 근대식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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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만큼 중요한 자유와 교양을 전해준 최초의 근대식학교
  • 김태현 기자
  • 승인 2024.07.02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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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15) // 고종이 하사한 이름 ‘배재학당’ (상)

우리나라의 영어교육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무려 1890년대부터 그랬으니 말이다. 1890년대부터 지금까지 식지 않은 우리나라의 뜨거운 영어교육열, 그 덕분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중등 사립학교가 탄생했다.

격동의 개화기, 조선에 가장 필요한 학문은 영어였다. 조선이 최초로 서양 국가와 맺은 근대적 조약은 미국과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이었다. 중국, 일본이 외국의 전부였던 조선에 서양 국가와의 교류가 시작됐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조선에는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필요했다.

아펜젤러는 제중원과 정동 진료소의 교사 신분으로 입국했지만, 그는 미국인이라는 장점을 활용해 영어 교육을 통한 학교설립을 꿈꿨다. 공식적으로 선교가 금지된 상황에서 선교의 활로를 뚫기 위해서였다. 또한 근대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으로 조선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1885년 아펜젤러가 조선에 도착한 해에 바로 이겸라, 고영필이라는 두 명의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이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당시 서양인에 대한 선입견과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32명의 학생이 교육받았다. 영어를 출세의 동아줄로 여겨 찾아온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1895년까지 배재학당 학생 중 정부에 통역관 등으로 고용된 학생이 33명이나 됐다.

영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어나자 고종은 흡족해하며 학당을 정식적으로 인정했고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이를 풀이하면 ‘유용한 사람을 길러내는 학교’란 뜻이다. 특히 고종은 ‘배재학당’이라 적힌 현판을 내리기도 했는데, 아펜젤러는 이를 조선 정부의 허락과 보호라며 기뻐했다.

그러나 아펜젤러는 고종과 학생들의 기대와 달리 배재학당을 단순하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나 통역관을 양성하는 기관으로 만드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아펜젤러는 “통역관을 양성하거나 기술자를 키우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교양인을 만드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며 일찍부터 조선사람들에게 중등교육을 넘어 고등교육까지 제공하려는 목적을 밝혔다.

배재학당은 영어는 물론이고 한문과 국어까지 가르쳤다. 아펜젤러는 유교사상을 종교로 보지 않고 도덕체계로 인식했다. 한문은 동아시아 사회에서 지식인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라 여겨 교육했다. 또한, 교양 과목을 설치했다. 스포츠의 전파를 위해 체육 과목도 개설했고 이는 우리나라에 축구, 야구, 농구 등이 정착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현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
고종이 하사한 배재학당 현판, 현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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