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부터 고종까지… 복음이 필요한 누구든 만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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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부터 고종까지… 복음이 필요한 누구든 만나리라”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6.0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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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⑫ 백정들의 친구 ‘사무엘 포맨 무어’

“짐승만도 못한 제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답니까? 임금님의 옥체를 만지는 어의께서 천한 백정을 치료해주셨다는 말입니까?”

1895년 서울에 창궐했던 콜레라에 걸려 사경을 헤매던 백정을 치료해준 사람은 고종 황제의 주치의 에비슨 선교사였다. 가장 비천한 신분이었던 백정은 이름조차 갖지 못했다. 성만 알아 박가라고만 불리던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박가의 아들 봉출은 죽어가는 아비를 살려달라며 누군가를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 봉출이 찾아간 인물은 백정들의 전도자 ‘사무엘 포맨 무어’(Sammuel Forman Moore, 1860~1906) 선교사였다. 

무어는 조선에 들어온 이후 알고 지내던 에비슨에게 치료를 요청했다. 에비슨이 여러 차례 왕진한 끝에 박가는 살아날 수 있었다. 어의가 백정을 치료하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 땅의 선교사들에게 임금이든 백정이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영혼이었다. 특히 무어 선교사는 백정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진정한 친구였다. 

무어, 백정을 만나다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 17번째 선교사 무어. 그는 1860년 미국 시카고 인근 그랜드릿지에서 출생했다. 아버지와 형님이 목사일 정도로 신앙적 가풍에서 자란 무어는 12살 때 선교사가 되겠다고 각오했다. 몬태나대학을 졸업한 그는 1889년부터 1892년까지 맥코믹신학교에 재학하며 선교사 파송을 준비했다. 

19세기 말 청년들의 선교 열정은 대단했다. 특히 맥코믹신학교에서만 14명의 선교사가 조선에 파송될 정도였다. 1892년 신학교를 졸업한 무어의 동기 중 3명이 미지의 땅 조선으로 향했다.

호남 선교의 개척자 루이스 테이트,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 그래함 리, 48년간 조선에서 사역한 윌리엄 스왈른 선교사가 무어의 졸업 동기이다. 

조선 입국 초기 무어 선교사의 눈에 들어오는 이들이 있었다. 백정(白丁)이었다. 주로 짐승을 잡는 도축업에 종사하던 그들은 천민 중에서도 천민이었다. 양반 신분의 10살 아이가 지나가면 노인 백정은 머리를 조아려야 했다. 갓도 망건도 쓸 수 없었고, 더구나 백정 신분은 자녀에게도 대물림됐다. 고종 재위 31년(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됐지만 백정들에 대한 차별은 달라지지 않았다. 

입국 초기 사무엘 마펫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 도심을 답사하던 중 백정들의 삶을 목격했고, 진정 복음이 필요한 이들이라고 확신했다. 무어는 1893년 백정들이 주로 살던 곤당골에 교회를 개척했다. 일반적으로 초기 선교사들은 양반들 중심의 정동, 연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사역하고 있었다.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던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무엘 무어 선교사. 그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복음전파 사명에 최선을 다하다 4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은 1893년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들(맨 왼쪽 무어 선교사 부부)

백정 출신의 박성춘 장로
무어는 조선에 온 이듬해부터 곤당골교회와 함께 ‘예수교학당’도 시작했다. 곤당골은 지금의 을지로1가 일대로 본래 이름은 고운담골이지만, 곤당골로 불리곤 했다. 무엇보다 예수교학당은 천민들이 배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바로 박가의 아들 봉출이가 예수교학당을 다니고 있었다. 아비의 생사고비 앞에 아들은 단 한 사람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인연으로 박가는 무어의 곤당골교회에 나오게 됐고 1895년 5월 세례를 받았다. 박가로 불리던 아버지에게 박성춘이라는 어엿한 이름도 생겼다. 아들 봉출이도 이름을 얻었다. 그가 바로 조선 최초의 의사 박서양이다.

그런데 백정 출신들이 교회에 등록하자 곤당골교회에 사단이 일었다. 40~50명의 출석 교인 중 절반이 갑자기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연유를 알 길이 없던 무어는 당황했다. 알아보았더니 백정과 같은 공간에서 동등하게 예배를 드릴 수 없다고 출석을 거부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어는 물러나지 않았다. 한달여 시간이 지나 떠났던 양반 교인들은 자신들이 잘못했다며 복귀를 약속했다. 대신 백정과 구분해 상석을 배정해달라고 제안을 내걸었다. 성경적 가르침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어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 여파로 양반 중심의 흥문섯골교회가 세워지는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곤당골교회에 화재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다시 백정과 양반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후 1905년 승동으로 교회를 이전해 지금까지 승동교회가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박성춘은 1911년 승동교회 초대 장로가 되었고, 3년 뒤 1914년 왕손 이재형도 장로가 되었다. 백정 출신과 양반 출신이 함께하는 당회가 구성될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의 능력 때문이었다.

“고종 황제를 전도하겠다”
무어는 누구보다 복음 전파에 있어서 저돌적이었다. 아내가 폐결핵을 심하게 앓자 1902~1903년 요양차 미국에 다녀왔던 무어는 서울 밖에도 복음을 전하고자 작은 나룻배를 구입해 ‘기쁜소식’(Glad-Tiding)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배를 타고 다니며 서해안 작은 섬이나 한강변 마을, 황해도 일대까지 복음을 전했다. 

한번은 황해도에서 경의선 철도 부설공사에 강제 동원된 조선 사람들을 만났다. 러일전쟁 중이던 일본군이 조선 사람들을 강제동원해 제대로 임금도 주지 않은 채 매질까지 하며 노역을 시키고 있었다. 억울한 조선 사람들이 손을 내밀자 무어는 일본 공사를 찾아가 항의하고 미국 언론에 수차례 기고까지 했다. 이 같은 무어의 행보에 선교사 출신 미국 공사 알렌은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을 우려해 만류했다. 하지만 그를 꺾을 순 없었다. 

알렌과 무어 사이에는 이전에도 갈등이 있었다. 이른바 ‘황제 알현 서신 사건’ 때였다. 무어가 고종에게 보낸 편지 한통이 발단이었다. 

뉴욕주립대 교수로 재직 중 미 국무성에서 편지를 입수한 고 임순만 목사는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으로 남겼다. 

“나 사무엘 무어는 미국의 시민으로서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신하들과 더불어 이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면 저를 불러주시기를 바라옵니다. - 존경하옵는 황제 폐하께.”

편지는 고종 손에 들어가지 않은 채 내무대신의 강력한 항의와 함께 알렌에게 전해졌다. 앞서 무어가 궁궐에 보내주면 고종을 전도하겠다고 제안했을 때부터 알렌과는 불편한 관계였다. 무어는 고종을 전도하면 엄청난 복음전파 영향이 있으리라 기대했고, 알렌은 오히려 조선 내 선교사들을 더 위험하게 만들 것을 염려했다. 

첨예한 갈등 끝에 무어는 무리한 측면이 있다는 취지에서 정식으로 사과했다.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 한동안 어려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하셨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1906년 무어는 평양신학교에서 구약과 영국 역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사역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장티푸스에 걸린 그는 1906년 12월 18일 46세를 일기로 세브란스병원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무어는 만 13년 동안 조선에서 불꽃처럼 복음을 전하다 주님 품에 안겼다. 로즈 무어 사모의 요청으로 시신을 운구해 자택에서 장례예배를 드린 후 양화진 선교사묘역에 안장됐다. 이듬해 1907년 딸 엘리자베스 출산한 사모는 3남 1녀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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