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실조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고
병원비 없는 환자에겐 뒷문 열어준, 따뜻한 의사
복음병원 설립하고 무의촌 무료 진료에 평생 바쳐
청십자의료보험조합 통해 한국 의료보험 정착 이끌어
“의사를 한 번도 못 보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
자신의 사비까지 털어가며 환자를 돌보았고 교수와 병원장을 역임하면서도 집도 없이 병원에서 제공하는 사택에서 거주하는 청빈한 삶을 살며 환자를 돌본 장기려 박사가 남긴 말이다.
이 말은 지난 2월부터 이어진 의료파업으로 인해 지친 우리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의료파업으로 인해 발생한 의료공백의 최대 피해자는 환자들이다. 의료공백으로 인해 사망 및 피해사례는 공식적으로는 0건이지만 간단하게 인터넷만 검색해도 치료 시기를 놓쳐 질병이 악화하거나 사망에까지 이르렀다는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었던 부와 안락을 포기하고 환자를 우선시해 ‘작은 예수’, ‘바보 의사’, ‘한국의 슈바이처’라 불렸던 장기려 박사의 삶은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의사로서 출중한 능력을 갖추고, 환자들에게 무료로 진료를 펼쳤던 그는 건강보험 정착을 이끌어냈으며, 병원을 건립하기도 했다.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착하고 충성되게 이루어 갔던 그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성장기
성산(聖山) 장기려 박사는 1911년 10월 5일생으로 ‘한국의 갈릴리’라 불렸던 평안도 출신이다. 당시 평안도는 기독교 세가 강했기 때문에 장기려 박사도 자연스럽게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또한, 장기려 박사의 조모였던 이경심 여사 역시도 기독교인이었는데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회갑에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할머니”라며 할머니의 기도 덕분에 자신이 의사로서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고백했다.
청소년기 그는 꿈은 교사였다. 하지만 입학시험에 낙방했고, 공학도를 꿈꿨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결국 집안 사정을 고려해 서울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전에 진학하게 됐다.
가세가 기울면서 상대적으로 학비가 저렴한 국립대학 진학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일제는 국립대학에 정치, 경제, 이공계열의 학과는 배제하고 법학부와 의학부만 설치했다. 정치, 경제 등은 조선 독립에 이용될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으며 법학부와 의학부는 조선통치에 유용하다 생각했기 때문.
자신이 원하던 길은 아니었지만, 경성의전에 진학하게 된 장 박사는 하나님 앞에 “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의 의사가 되겠다”는 서원을 했다. 그는 비록 의사로서의 삶을 꿈꿔본 적이 없고, 사명을 가지고 의사가 된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으로 의사가 됐다.
외과의로 우뚝 서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를 사람을 변화시킨다. 장기려 박사는 의사로서 실력도 출중했고 사명감도 넘쳤다. 당대 최고의 외과의사였던 백인제 교수의 제자가 되어 외과의로 이름을 날렸다.
스승이었던 백인제 교수는 장기려 박사를 매우 아껴 자신의 뒤를 이어 경성의전 외과학교실에 교수로 재직하길 바랐다. 하지만 장기려 박사는 환자를 돌보기 위해 평양에 있는 기독교 병원인 ‘기홀병원’에서의 근무를 선택했다.
장 박사는 외과의로서 수술 실력이 탁월했다. 특히나 1940년대 미개척 분야였던 ‘간’ 수술 성공은 그의 외과수술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일화이다. 그는 1943년 국내 최초로 간암 환자의 간에서 암 조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당시 우리보다 의료 여건이 앞섰던 일본에서도 불가능했던 수술이다.
동족상잔의 아픔과 함께한 개인적 슬픔
1945년, 꿈에도 그리던 해방이 찾아왔다. 이제는 기쁨과 행복만 가득할 줄 알았다. 그러나 해방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에 나라는 반으로 찢어져 버렸다. 이북 지역을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었던 장기려 박사는 김일성 정권에 의해 강제로 평남제1인민병원 원장 겸 김일성대학 외과과장이 됐다. 그는 출중한 의료 능력을 인정받아 공산당으로부터 많은 배려를 받았다.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허가받았고 수술 전에 기도하고 집도하는 것도 용인됐다.
공산 치하 평양에서도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던 장기려 박사는 6.25전쟁 기간중 결국 월남을 택했다. 유엔군이 평양으로 진군했다 철수하는 과정에서 국군에 합류해 대한민국으로 오게 된 것.
하지만 안타깝게도 장기려 박사와 얼떨결에 따라온 차남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들은 남쪽으로 피란하지 못했다. 한순간에 차남을 제외한 아내와 4명의 자녀들과는 생이별을 하게 된 것이다.
장기려 박사는 평생을 가족과 함께 피란하지 못했다는 후회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수차례 재혼 권유를 받았지만, 재혼하지 않았고 45년간 북한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네 자녀들을 그리워하며 살았다.
무료로 진료하다
가족과 생이별을 한 장기려 박사는 피란 끝에 부산에 정착했다. 그는 전쟁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부산의 한 교회 창고를 빌려 ‘복음병원’을 개원했다. 이 병원은 훗날 오늘날의 고신대학교복음병원이 된다. 천막 3개로 시작했던 병원이었지만, 유엔군으로부터 원조받은 약을 가지고 무료로 피란민들을 돌봤다.
무료로 치료해준다는 소문이 나 하루 평균 200명이 넘는 환자가 몰려들었다. 다행히 뜻을 함께하는 의료인들의 봉사와 시민들의 도움으로 진료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가 안정화되며 무료 진료는 끝이 났지만, 장기려 박사의 진료는 돈이 목적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치료비가 없는 환자를 밤에 몰래 뒷문으로 내보내며 “집으로 돌아가 푹 쉬고, 혹시 몸이 안 좋으면 돈이 없어도 꼭 다시 진료를 보러 와라”며 환자를 몰래 집으로 보낸 적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또한, 영양실조에 걸린 환자를 위해 처방전에 “이 환자에게 닭 두 마리 값을 내어주시오”라고 적어 돈을 내어준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뿐 아니라 장기려 박사는 은퇴할 때까지 매월 1회 의사가 없거나, 의료시설이 없는 의료취약지역인 무의촌에 방문해 진료를 했다. 현상유지조차 벅찼던 초기 복음병원에서 추가적인 인력, 장비, 약값 등이 소요되는 무의촌 방문 진료는 장기려 박사의 환자를 향한 사랑과 헌신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건강보험의 기틀 마련
장기려의 유산 중 단연 으뜸은 건강보험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사회보장제도인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 정착에는 장기려 박사의 노력이 숨어 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사회와 경제는 안정을 찾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료비용은 여전히 일반서민에게 있어 부담이었다. 당시 기사 중 “죄수가 탈옥하듯 극빈환자들이 병원을 탈출하고 있다. 치료비를 안 물기 위해 극빈환자들을 병든 몸으로 탈출을 감행한다”라는 내용이 있을 정도다. 또한, 1975년 조사에 따르면 도시 환자 약 15%와 농촌 환자의 약 50%가 경제적 이유로 병원에 가지 못한다는 통계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의료보험은 의료 혜택을 더 많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데 꼭 필요한 제도였다. 정부 차원에서 1959년부터 의료보험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으며 법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민간 차원에서의 의료보험 조합이 조직됐지만, 인식부족과 통계부족,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모두 실패했다.
그러던 중 장기려 박사를 필두로 한 부산의 23개 교회가 힘을 합쳐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하여 건강보험 정착에 기여했다. 당초 모임은 부산모임이라는 이름의 성경공부 모임이었다. “성경공부도 좋지만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하자”는 제안에 의료보험 조합이 설립됐다. 미국 대공황 시기 파산한 실업자들을 위해 시행됐던 민간의료조합 ‘청십자’를 모티브로 해 이름을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라 지었다.
부산 23개 교회 성도 723명을 중심으로 시작한 조합은 첫해 1,662명의 회원밖에 모집하지 못했다. 당시 담배 한 갑이 100원이었는데 조합원은 1인당 매월 60원의 보험료만을 납부했기에 초창기에는 재정난에 시달렸다. 장기려 박사는 조합의 재정 건전성을 위해 사재를 출연하기도 했으며 국가로부터 보조금과 지방 보조금을 얻어내는 등 재정을 안정시켰다.
성공적으로 정착한 조합은 1977년 정부가 정식 의료보험사업을 진행하기 전까지의 공백을 메워주었다. 장기려 박사는 국가 차원의 의료보험이 실시되자 조합을 해체했고 조합의 전 자산을 지역의료보험에 인도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정착과 우리나라의 의료 공공성 제고에 대한 기여가 인정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도 의료보험의 시작을 1968년 부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창립부터라고 소개하고 있다.
삶의 끝자락까지 이어진 헌신
장기려 박사는 은퇴 후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낮은 곳에서 환자를 돌보며 기독교인으로서 모범을 보였다.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의 의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65년간 지킨 그는 병원에서 제공하는 비좁은 옥탑방에 살면서도 환자를 떠나지 않았다.
집 한 채 없는 상황에서도 “나는 아직 가진 게 너무 많다”고 고백했던 장기려 박사는 1995년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기념하는 성탄절에 향년 84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겼다.
그의 헌신은 사회에서도 인정돼 1961년 대학의학협회 학술상, 1979년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 1996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으며, 2006년에는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교회마저도 세속화된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어른’인 장기려 박사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개인의 아픔과 슬픔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지키는 삶, 하나님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삶을 본받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