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벌(天罰), 신벌(神罰), 천형(天刑)’. 모두 한센병을 부르던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현대까지 사람들은 한센병을 하늘이 내린 벌이나, 신이 내린 저주로 여겨 핍박하고 멸시했다. 천대받는 한센병 환자를 돌보는 애양원에도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포사이드 선교사의 이웃 사랑이 애양원 탄생의 단초를 제공했다. 목포에서 환자를 돌보고 있던 포사이드는 동료인 오웬 선교사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치료하기 위해 광주로 급하게 말을 타고 이동했다. 가던 길에 그는 길에 쓰러져있는 한 여인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한센병에 걸린 여인이었다. 포사이드는 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말을 끌었다.
이 모습을 본 조선인들은 크게 감명 받았다. 같은 조선인들도 전염에 대한 두려움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데, 외국인이 냄새나고 진물이 흐르는 환자를 부축하고, 돌보았기 때문이다. 특히나, 최흥종은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충격을 받아 평생 목사로서 헌신했고 나환자들을 섬겼다.
포사이드는 데리고 온 한센병 환자를 윌슨 선교사가 원장이었던 광주 제중원에 입원시켰다. 그러나 제중원 환자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혀 병원 근처 벽돌 가마터에 간이침대를 설치하고 한센병 환자를 위한 임시거처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환자는 2주만에 사망했다.
이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 건물이 필요하다고 느낀 윌슨 선교사는 병원 건립에 나선다. 병원 건립을 위해 최흥종은 자신 소유의 땅 1,000여 평을 헌물했고 1912년 광주나병원이 세워졌다.
1923년에 이르러서 입원 환자는 500명을 넘어선다. 이에 광주 시민들은 “광주를 나병환자 소굴로 만들 거냐!”며 항의했다. 어쩔 수 없이 상대적으로 교외인 여수 신풍리로 이전하게 된다. 이전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밤에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윌슨은 한센병 환자들이 겪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함께 당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애양원은 단순하게 치료하는 병원으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신앙공동체와 직업학교의 역할도 담당할 수 있게 만들었다.
특히 애양원은 기독교 환자가 60% 이상일 정도로 신앙적 분위기가 형성된 곳이었다. 또한, 윌슨은 농사, 목공, 석공 등 직업교육을 통해 환자들이 자기효능감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애양원은 1988년 사회복지법인을 거쳐 현재 일반 병원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