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장로교회가 탄탄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초석을 다졌던 것으로 손꼽히는 사역자가 사무엘 오스틴 마펫(Samuel Austin Moffett, 1864~1939) 선교사이다. 보통 ‘마포삼열’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전히 많은 성도들은 그를 잘 알지 못한다.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놓았던 그의 생애를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26살 젊은 나이에 파송 받아 70세 넘어서까지 이 땅에서 사역하며 무수히 많은 교회를 개척했고 학교들을 세웠다. 특히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했다. 나아가 평양 3.1만세운동을 물심양면 도우며 조선 사람과 똑같은 마음으로 대한독립을 열망했다. 평양 중심의 마펫의 사역을 돌이켜보면, 과연 ‘한국교회의 아버지’라는 별칭이 붙을 만한 생애였다.
생일에 도착한 선교지 조선
1864년 미국 인디애나주에서 출생한 마펫 선교사는 하노버대학을 졸업 후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다.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해 목사안수를 받고는 1889년 4월 미국 북장로교 파송을 받아 마침내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1890년 1월 25일, 26살 청년은 자신의 생일에 조선에 첫 발을 내딛었다.
마펫은 조선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로 소탈했고, 성향은 적극적이고 진취적이었다. 입국 후 3~4년 동안 한반도 각처를 직접 도보로 순례한 끝에 ‘평양’에서 사역을 결심했다. 평양선교부 설치 후 거리에서 전도하고, 마을 사랑방을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한번은 회개를 선포하는 그에게 누군가 돌팔매질을 해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해코지 했던 인물은 후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자 제주 선교의 아버지 이기풍 목사였다.
예배 처소가 없던 차에 마펫은 훗날 장대현교회가 될 평양의 첫 번째 교회 ‘널다리골교회’를 개척하게 된다.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 덕에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릴 정도로 부흥을 거듭하게 된다.
평양 사람들은 마펫의 헌신적인 사랑으로 예수님을 보게 됐다.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모든 외국인들은 피난길을 떠났지만, 그는 평양 주민들을 돌보기 위해 끝까지 남았다. 전쟁 후 감동을 받은 많은 평양 사람들이 널다리골교회로 몰려 왔다.
한국 장로교의 아버지 ‘마펫’
한국 장로교 신학교육의 출발점도 마펫 선교사였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뿐 아니라 앞서 온 선교사들은 주로 서울을 중심으로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반면 마펫은 평양을 중심으로 학교를 세웠고, 특히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자신의 사랑방에서 ‘조선야소교장로회신학교’를 시작했다. 우리가 잘 아는 ‘평양장로회신학교’의 모태로, 평양공의회는 마펫을 초대교장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평양장로회신학교는 1907년 한국교회 최초의 7인 한국인 목사를 배출하게 된다. 서경조, 한석진, 송린서, 양전백 ,방기창, 길선주, 그리고 마펫에게 돌팔매질 했던 이기풍이 목사안수를 받았다. 마펫을 한국 장로교회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데에는 신학교육을 통해 단순히 목회자를 배출했기 때문이 아니다.
백석대 이상규 석좌교수는 “첫 졸업생을 배출하고 치리회 조직이 시급했고, 1907년 독노회를 구성하게 된다. 독노회의 초대노회장으로 선임된 마펫 선교사는 장로교회의 기초 제도뿐 아니라 학습, 세례, 입교 등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 원칙을 세웠다. 제사문제, 중혼문제 등에 있어서 보수적이고 복음주의적 관점에서 엄격하고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며 “이런 점에서 그를 한국장로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펫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대학 ‘숭실대’를 설립했고, 3숭(崇)이라고 불리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여학교까지 설립해 애국적 신앙심을 갖춘 인재들을 대거 배출하게 된다.
1919년 3.1만세운동은 서울 탑골공원에서 처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간적으로 보면 평양에서 처음 만세가 시작됐다. 그 평양만세운동의 주역들이 숭실에서 배출한 인재들이었고, 심지어 마펫은 만세운동 준비를 위한 젊은이들에게 자신의 집 지하실을 몰래 내어주기도 했다. 3.1운동 당시 일제의 폭압을 목격하고는 매우 적극적으로 미국 선교부와 해외 언론에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신사참배 거부, 학교 자진 폐쇄
조선총독부 입장에서 마펫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마펫은 지적 열망이 충만한 조선은 독립할 자격이 충분하다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국정신을 가진 신앙인들을 계속 길러내고 있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강화하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마펫과 평양의 신앙인, 숭실의 학생들은 위협에 굴하지 않았다. 1936년 마펫이 기록한 서신에는 “학교 문을 닫게 되더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기도 했다. 결국 1938년 자진 폐교를 선택하게 된다. 숭실의 자진 폐교는 전국의 기독교 학교의 자진 폐교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 우상을 숭배하느니 차라리 학교 문을 닫겠다는 조치는 독립의지를 더욱 고양시키고 확산시켰다. 70세가 넘은 나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은 대쪽 같았다.
그런데 1936년 10월말 마펫은 급히 미국으로 향하는 귀국길에 올랐다. 마펫을 암살하려고 한다는 유력한 제보가 들어왔고, 평양 성도들은 마펫을 기차와 배편에 태워 전송했던 것.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지만, 성도들은 담임목사의 생명만큼은 지키고자 했다.
대를 이은 선교지 사랑
한반도에서 44년을 사역한 선교사에게 미국은 오히려 낯선 땅이었다. 가까스로 아내의 고향이었던 LA 인근에 지인이 내어준 창고를 개조해 머물렀다. 번지조차 없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실은 잠시 머물다 기어이 한국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다. 여러 번 시도도 했지만 늘 무산됐다. 결국 쇠약해진 마펫은 1939년 75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유품 중에는 조선으로 가기 위한 ‘배표’가 한 장 있었다. 조선을 떠나올 때 왕복표를 끊었던 것을 보면 끝까지 조선을 향한 사랑과 열정을 간직했던 것이 확실하다.
한편 마펫 선교사는 LA 공원묘지에 안장됐지만, 그의 유해는 사후 70년 만인 지난 2006년 한국 장로회신학대학교에 이장됐다.
조선을 향한 마펫 선교사의 헌신은 그 자녀들에까지 계승되기도 했다. 마펫 선교사는 생전 평양에서 5명의 아들을 낳았고, 이 중 4명이 목회자, 1명이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2명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같이 복음을 위해 일했다. 삼남 사무엘 휴 마펫(마삼락)은 중국 선교사역 중 추방된 후 한국에 돌아와 후학들을 양성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아세아연합신학대학 초대 학장 등을 역임했다.
사남 하워드 마펫(마화열)은 의료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됐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으로 철수한 그는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군의관으로 자진 입대했다. 모두가 의아해 했지만, 그만큼 한국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하워드는 대구에서 의료선교에 매진했고, 그의 묘소는 일생을 헌신했던 계명대학교 동산병원에 조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