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 거부하며 1938년 자진폐교
상태바
신사참배 거부하며 1938년 자진폐교
  • 김태현 기자
  • 승인 2024.05.28 2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 기독교 유산을 찾아서 (11) // 국내 유일 ‘폐교기념일’ 존재 대학교 (하)
숭실대학교의 상징인 백마상. 백마상 중간의 빈 공간은 폐교했던 역사를 상징한다.
숭실대학교의 상징인 백마상. 백마상 중간의 빈 공간은 폐교했던 역사를 상징한다.

숭실대학교가 폐교를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폐교가 부끄러운 것이 아니며 오히려 당당하고 자랑스러워할 역사이기 때문이다. 조국을 수탈하는 일제에 맞서 저항했고, 신앙인으로서의 절개를 지킨 결과가 ‘폐교’였기에 당당하게 폐교기념일을 기념하고 있다.

숭실학당 대학부의 폐교가 더욱이 당당한 이유는 스스로 폐교를 결정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광란의 폭주를 하던 1938년 3월 4일 숭실학당 대학부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며 마지막 졸업식을 끝으로 자진 폐교를 단행했다. 대학부 설립 39년 만의 일이었다.

폐교는 단 한 번의 결단이 아니었다. 숭실학당 대학부는 우리 민족의 독립에 앞장섰던 학교로 숭실학당 대학부의 졸업생 및 재학생은 항일운동에 적극적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숭실학당출신 독립유공자만 88명에 달한다.

이들은 을사늑약 반대운동, 조선국민회 사건, 평양에서의 3.1 만세운동 등을 주도하면서 일제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3.1 평양학생만세운동으로 검거된 인원 173명 중 107명이 숭실학당의 학생일 정도였다.

이 때문에 1925년 숭실학당 대학부의 4년제 인가가 취소되고 전문학교가 되어 숭실전문학교로 격하되는 아픔을 맛보았다. 그러나 이런 아픔도 숭실학당 대학부의 독립을 향한 열망을 꺽지 못했고 그 결과가 신사참배 거부와 자진 폐교였다.

우리나라가 염원했고 숭실학당이 그토록 바랬던 독립을 이루고 숭실학당은 재건된다. 기존의 위치였던 평양은 남북분단의 아픔으로 이룰 수 없었고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 숭실학당 대학부는 1954년 설립인가를 얻었는데, 이는 자진폐교 16년만이었다. 숭실대학교는 지금까지도 3월 4일을 폐교기념일로 지키고 있으며 학교의 상징인 백마상의 중간 부분을 비워 단절됐던 학교의 역사를 기리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