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로 입증할 수 없는 자연의 설계 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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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로 입증할 수 없는 자연의 설계 내재
  • 박찬호 교수 백석대
  • 승인 2023.06.07 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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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13)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박찬호 목사
박찬호 목사

10개의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중에 로스앤젤레스(LA)에 있는 UCLA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매우 잘 알려져 있는 대학이다. 라디오 방송 중에 어느 가수가 ‘우클라’로 읽어서 많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던 대학이다.

UCLA는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중 상위에 속하는 대학이기는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인근 버클리에 있는 UC버클리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만큼 UC버클리는 명문 중의 명문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2000년대 초에는 하버드 대학이나 예일 대학을 제치고 전 세계 대학 랭킹 1위를 차지했던 적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UC버클리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들의 교훈은 창세기 1장 3절의 “빛이 있으라”(Fiat lux)이다.

UC버클리의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던 필립 존슨(Philip E. Johnson, 1940~2019)은 1991년 『피고석의 다윈』(Darwin on Trial)이라는 책을 통해 진화론을 공격하고 이른바 지적설계 이론을 주장하였다. 창조과학이 진화론에 대한 대안이 되기에는 너무나 극단적이라고 생각하였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호응하였고 이후에 윌리암 뎀스키나 스티븐 마이어 등이 지적설계 운동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지적설계 운동은 필립 존슨이 처음 주장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초에 이미 영국 성공회 사제였던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 1743~1805)가 1802년 『자연 신학 또는 신성의 존재나 속성에 대한 증거』라는 긴 제목의 책에서 주장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 가운데 목적론적 논증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이 그러하듯 이 목적론적 논증도 결정적으로 무신론자들을 잠재울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설계론자들이 진화론에 반대하여 주목하는 현상 가운데 한 가지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이라고 할 수 있다. 표현이 어렵기는 하지만 우리 인간의 눈을 생각하면 된다. 인간의 눈과 같은 구조물은 오랜 진화의 기간을 통해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눈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복잡성이라고 하는 것은 모종의 설계자가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자연계에 존재하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은 진화론 반대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된다. 동시에 모종의 설계자가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이기에 설계론자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환원불가능한 복잡성(irreducible complexity)이라고 하는 말은 생화학자이자 지적설계 지지자인 마이클 비히(Michael Behe, 1952~ )가 쥐덫을 예로 들며 처음 사용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개념 자체는 그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찰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이런 주장을 하였다고 한다. “어떤 복잡한 기관이 있어 많은 횟수의 연속적이며 작은 수정을 거쳐서 형성될 수 없음이 입증된다면 나의 이론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

유명한 기독교 작가인 필립 얀시(Philip Yancey, 1949~ )는 자신이 설계론자들의 주장에 쉽사리 설득되는 편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설계론이 가지는 한계에 대해 지적하고 있다. 자연의 증거라고 하는 것은 반반이라는 것이다. 어떤 자연 현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듯하지만 또 다른 자연 현상은 하나님의 존재를 반증하기도 한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우리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한다. 하지만 토네이도나 쓰나미가 휩쓸고 간 잔해를 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기는 불가능하다.

얀시는 인종차별을 자행하는 미국 남부 애틀란타에서 태어났다. 10대에 형과 함께 근본주의 교회를 떠나 무신론자가 되었다. 하지만 얀시는 3가지를 보고 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다. 낭만적인 사랑이 있는 것, 자연의 아름다움, 그리고 클래식 음악이 있는 것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회복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10대에 얀시와 함께 교회를 떠났던 형은 아직도 무신론자라고 한다. 얀시는 이런 형과 같은 사람들, 경계선에 서 있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쓴다. 아직 그의 설득이 먹히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이 얀시의 글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지만 정작 형은 아직 여전히 냉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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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트 2023-10-09 17:26:28
점성술도 과학이라 인정하는 숨막히는 어리석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