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보수, 삶은 진보, 목회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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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보수, 삶은 진보, 목회는 은혜입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3.06.05 14: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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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주감사교회 김강수 목사(부천노회장)

“믿음대로 사신 어머니가 신앙의 모델이자 스승”
“죽음의 위기에서 부르신 목회의 길, 최고 행복”

“어머니가 악한 영에 사로잡혀 3년 동안 해결이 안 되었는데, 어느 날, 식사하던 중 ‘죽어도 하나님의 딸, 살아도 하나님의 딸’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때 악한 영이 나간 것이죠.”

주감사교회 김강수 목사는 모태 신앙인이다. 특별한 신앙체험을 가진 어머니가 신앙의 모델이었다. 김 목사의 할아버지는 대농이었다. 덕분에 어릴시절부터 부유하게 자란 편이었다. 밥을 굶지 않아도 됐던 건 지금 생각해도 참 감사한 일이다. 어떻게 보면 신앙을 갖지 않더라도 부족할 것 없는 집안 환경이었다.

믿는 집에 시집간 고모가 복음을 처음 집안에 전했다. 귀신에 들렸다 자유롭게 된 어머니는 눈물의 기도와 전도의 씨앗으로 열매를 맺었다. 마을주민들은 결국에 어머니 덕에 대부분 예수를 믿었다.

“어머니는 어려운 형편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전남 강진 도암중학교 옆집에 가면 밥 주고 재워준다고 소문이 보따리 장수들 사이에선 자자했어요. 그분들이 김, 멸치, 미역도 주고 가셨어요. 제게 크게 될 녀석이라고 좋은 말씀을 해주셨던 기억도 납니다.”

모두에게 인자하고 넉넉했던 어머니지만 자식들에게 신앙교육만큼은 아주 엄격했다. 말씀대로 살려고 먼저 본을 보여주고자 했다. 주일에 교회에 입고갈 한복을 칼같이 다리던 어머니가 눈에 선하다. 김강수 목사의 기억 속 어린 시절은 늘 교회와 함께하는 일상이었다.

“교회를 지을 때 냇가에서 모래를 퍼서 나르고, 자갈을 들통에 지고 날랐던 추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그 예배당이 고향에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김강수 목사를 신앙의 길로 목회의 길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신앙의 모델이자 스승은 평생 믿음대로 살려고 애썼던 어머니였다.
하나님께서는 김강수 목사를 신앙의 길로 목회의 길로 인도하셨다. 그리고 신앙의 모델이자 스승은 평생 믿음대로 살려고 애썼던 어머니였다.

신앙의 모범 따라 목회자로
많은 이들이 그렇듯 김강수 목사도 20대 때는 야심이 컸다. 정치인이 되고 싶어 준비한 시간도 있었다. 뜻하지 않았던 목회의 길로 가게 된 건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대학 친구들과 모임을 하는데 갑자기 어머니와 함께 불렀던 찬송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가 생각나는 겁니다. 잠시 나와서 지하 교회를 찾아가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게 됐죠.”

서울시 행정직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신앙은 더 깊어졌다. 어머니 품을 떠나 세상에서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다는 생각이 커졌다. 도박과 술값을 빌려준 게 아니라면돌려 받지 않아도 된다는 어머니 말씀은 아낌없이 베풀고 도우라는 뜻이었다. 믿음대로 살려고 하는 청년에게 “목회하라”는 권면이 쏟아졌다. 어머니뿐 아니라 고향교회 목사님부터 주변 성도들까지 신학을 참 많이도 권했다.

“고향 교회 담임목사님은 민주화 운동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런 목사님도 저녁만 되면 2km 정도 떨어진 곳에 손전등만 들고 산기도를 다니셨거든요. 생활도 청빈 그 자체였습니다. 독재정권에 항거하다 무기징역까지 받으셨던 목사님처럼 살 자신이 제겐 없었어요.”

목회의 길이 쉽지 않다는 걸 그때 깊이 배웠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를 목회의 길로 인도하셨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그에게 누군가 방배동 신학교를 추천해주었고, 보수신학의 길을 열어주었다.

“1984년 처음 왔을 때 학교가 참 초라해 보여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초창기였으니까요. 그래도 외형보다 내용을 보자 마음먹었습니다. 신학은 보수적이어야 맞고 삶은 진취적이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집안 최초의 목사가 나왔다. 마을 전체의 경사였다. 당시 시골에선 목회자는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행사가 있으면 상석으로 목사님을 모셨던 때다. 어쩌면 부모님에게 그가 목회자가 된 것은 최고의 효도였는지 모른다.

2번 겪은 죽음의 위기
그가 신학을 결심하게 된 계기에는 두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한번은 청년부 시절 7개 교회와 연합해 수련회를 갔다가 가평 밤섬에서 고립됐다. 비가 온 후 새벽이 불어난 물에 도저히 육지로 건너갈 수 없게 된 것이다.

“떠내려가지 않도록 모든 짐을 밤나무에 묶고, 서로 손잡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건너편에서 밧줄을 던져주려 했지만, 특히 자매들은 건널 수 없었어요.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며 유언기도까지 했죠. 새벽 4시경 지나가던 공군 중령이 급히 구조 헬기를 보내주어 살 수 있었습니다. 은혜 아니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또 한 번의 죽음의 위기는 감전 사고였다. 공무원을 사직하고 주일을 잘 지킬 수 있는 회사를 추천받아 다니던 곳에서 큰 사고가 난 것이다. 10여 명이 동시에 감전되는 대형 사건이 발생했고, 김 목사가 그 중 한명이었다.

“감전될 때 이제 죽는구나 하고 엄청난 공포를 느꼈어요. 붕 떴다가 제가 제일 나중에 떨어졌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딱 하루만 병원에 가고 큰 이상이 없는 겁니다. 감전을 지켜봤던 분들이 하는 말이, 제가 감전 상태에서 ‘주여 삼창’을 외쳤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 역시 저를 사명자의 자리로 부르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
김강수 목사는 신학을 공부한 후 부교역자로 시무하다 30대에 주감사교회를 개척해 지금까지 달려왔다. 김강수 목사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기뻐하는 목회를 할까 늘 생각했다”며 “카리스마적인 목회자보다 성도들과 부대끼는 목회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며 그간 목회 여정을 들려주었다.

큰 위기도 있었다. 먹고 사는 건 개척하면서부터 하나님께 맡겼지만, 목회를 쉬고 있던 다른 목회자에게 개척보증금을 빌려주었다가 어려움이 생긴 것이다. 목회의 기로였다. 김 목사는 집을 팔아 부채를 해결하고 교회에 들어가 살며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목회로 귀결되었지만, 가족에게는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다. 목회를 시작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것 외에는 다른 것을 하지 말라고 아내에게 말했다. 김 목사는 “세상적으로 보면 여성으로서 삶은 없는 사모의 길이었다. 아내가 없었으면 목회를 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딸이 어릴 적에 하나님께서 다 먹이신다고 하면 뻥 치지 말라고 했거든요. 우리 어머니가 제게 했던 말씀이고, 제가 똑같이 했던 반응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 딸도 하나님께서 다 주신 것이 맞다고 이야기합니다. 돌아보면 은혜 아닌 게 없습니다”

김강수 목사는 외부사역이 많은 편이다. 노회와 총회 사역도 다양하게 경험했다. 주어진 일을 잘 마쳐야 한다는 각오로 임하곤 한다.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각오다. 요즘엔 목회에 더 전념해야 한다는 마음을 품고, 후임 목회자를 위한 그루터기를 준비하려고 기도 중이다.

총회와 노회 경험이 풍부한 선배 목회자로서 후배 목회자들에게 조언을 부탁했다.
“주님과 내 관계가 바로 서 있으면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뚜벅뚜벅 걸어가라고 하고 싶습니다. 목회에서 성공과 실패는 있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살아계시는 주님께서 함께해주실 것입니다.” 이인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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