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칼럼]슬픔은 표현됨으로부터 치유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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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 칼럼]슬픔은 표현됨으로부터 치유되는 것
  • 곽혜신 애도상담사(각당복지재단)
  • 승인 2023.05.23 2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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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을 생각하다⑪

‘공허하다, 무기력하다, 목이 멘다, 혼자 있고 싶다, 외롭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한 후 호소하는 이러한 표현들을 다 아우를 수 있는 한마디의 표현은 무엇이 있을까? 바로 ‘슬프다’이다. 알렌 휴콜 주니어 박사는 이 슬픔(grief)을 표출하는 과정이 지나야 비로소 온전한 애도(mourning)의 과정으로 들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인간의 발달 과정 중 배우자를 사별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몇몇 연구에 의하면 여성은 배우자의 사별을 장애나 결핍으로 인식을 하고, 남성은 배우자의 사별을 인생의 실패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수년 전 아내와 사별한 40대 남성을 만난 사례가 떠오른다. 그는 사춘기 연령의 아들 둘이 있는 아버지였으며 유방암의 발병, 재발 등으로 4년여 동안 투병하던 아내와 사별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보통 사별 후 한 달 이내에는 애도상담을 진행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탄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남성은 상담받고자 하는 의지가 매우 강했다.

그는 아내와의 사별로 인해 변화된 환경과 역할에 매우 부담과 불안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동안 아내를 간호하느라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직장생활에서의 자신의 입지, 아내의 사별로 엄마의 역할과 며느리 역할까지 더해진 역할의 정체성의 혼란으로 삶의 무기력함을 느끼면서도 아이들을 생각해 상담을 받아서라도 빨리 사별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싶어 했다. 

책임감이 매우 강하고 스스로를 완벽한 성향이라고 표현한 이 남성은 사별의 슬픔을 인식하고 표현하기도 전에 수행해내던 역할 이외에 추가로 더해진 역할의 틀에 갇혀 심신이 이미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에게 물었다. “사실 지금 무엇이 가장 하고 싶으세요?” 그는 머뭇거리다 “사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아무 에너지가 없어요. 슬퍼하고 싶은데 슬퍼할 수도 없어요”라며 그제야 아내를 사별한 남편으로서의 모습으로 굵은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 그는 “아내가 너무 그립고 너무 보고 싶어요. 나에겐 엄마 같은 아내였어요. 운전하다가 아내와 자주 다니던 길, 음식점, 카페 같은 곳을 지나갈 때 부부나 커플 같은 사람들을 보면 화가 나고 질투가 나요”라고 사별 후 어디에서도 표현하지 않은 속마음을 처음 표현했다.

슬픔은 표현됨으로 치유되고 모든 상실에는 애도가 필요하다. 애도는 시간이 흐른다고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별의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그다음은 슬픔의 감정을 표현해야 건강한 애도가 될 준비가 비로소 되는 것이다.

아내를 사별한 이 남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밖으로 표현하지 않은 다양한 슬픈 감정들을 하나둘씩 표현하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몇 번의 상담이 지나고 만난 어느 날, 그는 지난 주말 용기를 내어 두 아들과 함께 생전에 아내와 갔었던 여행지에 다녀왔다고 말했다. 여행지에 가서 아이들과 아내에 대한 기억과 추억에 대해 좀 더 자연스럽게 이야기 나눌 수 있었다며 오랜만에 편안함과 행복함을 느꼈다고 한다. 또한 앞으로 아내와 다녔던 곳들을 추억여행을 다니기로 했다고 말하며 아내가 늘 함께 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잘 키울 것이라고 한결 편안한 미소를 머금고 이야기를 전하던 모습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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