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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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 운영자
  • 승인 2023.04.13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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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이유

갈라디아서 2:20~21
찬송: 349장

 

성도님들에게 삶의 목적이 뭐냐고 물으면 대부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 십자가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이 말은 십자가 안에서 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상징합니다. 죽어야 진짜 사는 길이 열립니다. 이제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서십시오. 그저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십자가 안에 온전히 들어서야 축복의 문이 열립니다.

둘째,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요새 많은 사람들이 축복의 길을 찾아 헤매는데 진정한 축복의 길은 결국 예수님을 믿고 믿음을 체질화시키는 삶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 안에 산다는 것은 좁은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은혜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밤새 물고기를 못 잡고 지친 몸으로 빈 배를 끌고 오자 예수님은 그의 빈 배에 ‘고기’를 채워주시기 전에 ‘말씀’을 채워주셨습니다. ‘물질이 채워지는 것’보다 ‘은혜가 채워지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많이 받으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많이 받아도 부작용이 없는 거의 유일한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힘입어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내가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바로 인지하고 그 안에 살게 하옵소서!

 

 

열매 맺는 복이 있는 성도

시편 1:1~6
찬송: 478장

 

농부가 무엇을 심을 때는 열매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씨를 뿌립니다. 그런데 씨를 언제 어디에다 뿌리느냐는 매우 중요합니다.

물가에 심었을 때 많은 열매를 수확 할 수 있습니다. 식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수분입니다. 아무리 금싸라기 땅이라 할지라도 물이 없는 곳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기에 성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에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죄인들의 길을 따르지 않아야 하고 악인들의 꾀를 분별하고 오만한 자들이 앉아 있는 자리는 빨리 떠나야합니다. 뇌물에 눈이 어두워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타이밍, 곧 시기를 잘 맞추어야 합니다. 시기를 놓치고 씨를 뿌리면 잘 익은 열매를 수확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수확을 해야 할 시기를 놓치면 상한 열매를 가지고 오게 됩니다. 심어야 할 때와 거두어야 할 때를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고 자연의 시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의 인생에서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시간에 나를 맞추어야 합니다.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수확을 할 때 까지 정성을 들여 거름을 주고 비료를 주며 인내를 했을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의 열매를 위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며 계속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땅에 열매를 위해서 노력을 해야 하듯 믿음의 열매를 맺는 복 있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부활과 생명이신 예수

요한복음 11:25~26
찬송: 171장

 

죽었는데 다시 살아난 기적이 성경에 여덟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 아들을 살리고, 엘리사는 수넴 여자 아들을,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 아들을, 야이로의 딸을, 나사로를, 베드로는 다비다를, 바울은 유두고 청년을 살립니다. 예수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납니다.

이 사건들 속에서 살아난 일곱 명과 예수님 한 분과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곱 명은 살아났지만 또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살아나서 다시 죽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점은 일곱 명 모두는 사람을 통해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살렸습니다. 사람을 통해 살려진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신 예수 사건은 절대 중요합니다. 이 일이 부활 신앙을 갖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린다는 신앙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도 부활한다는 신앙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살리신 부활의 몸은 사망이 주장 못하고 썩지 않는 몸입니다. 이러한 부활이 한 사람 예수로부터 옵니다. 사망이 한 사람 아담에게서 온 것 같이, 부활 역시 한 사람 예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부활과 생명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부활 신앙의 확신 속에 주와 행복한 동행하게 하소서.

 

 

주님이 기억해 주는 자

누가복음 23:39~43
찬송: 151장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의 죄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가장 위대한 날, 가장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성금요일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평안을 누리며 죄와 허물이 덮어졌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내 뜻이 아닌 오직 하나님 뜻대로 십자가 길을 갈 때 예수님께 기억되는 존재가 됩니다.

첫째는 여인들입니다. 예수님의 모친, 요한과 야고보의 모친 살로메, 일곱 귀신 들려 고침 받은 막달라 마리아와 각 처의 많은 여인들입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육체의 고통으로 걸어갈 때 3년간 동고동락하며 사역하였던 제자들은 모두 떠났지만 여인들은 눈물 흘리며 동참하였습니다. 바로 성도가 교회를 향한 사랑의 눈물, 원수까지 사랑하는 용서의 눈물, 구원하신 감사의 눈물이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두 행악자입니다. 한편의 행악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원망, 불평, 비방하였으나 다른 한편의 행악자는 ‘나는 당신이 구원자임을 믿으며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약하고 가난하고 병든 자,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 특히 구원자로 믿는 자를 기억 하시고 계십니다.

•오늘의 기도
아무 죄도 흠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 사형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사오니 경건하고 거룩한 삶으로 주님이 기억하시는 자로 살게 하소서.

 

 

경건을 위해 자신을 연단하라

디모데전서 4:7~8
찬송: 420장

 

요즘 현대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건강을 위해 많은 것들을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운동 동아리들과 운동 시설이나 체육관들도 넘쳐나고, 각종 건강식품과 영양제들도 넘쳐납니다. 다 자신의 몸을 단련하여 건강을 유지하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도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한 투자나, 육체의 연단은 분명 유익이 있습니다. 꾸준히 운동을 하고 자신을 관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오늘 본문은 ‘약간의 유익’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익의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강조하시는 말씀은 “경건을 위해서 자신을 연단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고,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임을 말씀합니다. 유익의 범위가 육체의 연단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 경건을 위해 자신을 연단하는 일에 애쓰고 힘쓰지 않고 있습니다.

연단(연습, 단련)이라는 말을 쓴다는 것은 이것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힘쓰고, 애쓰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는 그 이상으로, 경건을 위해 자신을 연단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자신을 연단(연습, 단련)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비웃음을 딛고 일어나라

마가복음 5:35~43
찬송: 430장

 

오늘 본문에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과 12살 된 야이로의 딸이 등장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리러 가는 도중에 예수님은 자신의 옷자락을 만진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쳐주셨고, 그 사이 야이로의 딸이 죽게 됐지만 딸 또한 예수님이 살려주신 이야기입니다.

혈루증 앓는 여인은 예수님 옷자락만 만져도 나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숱한 조롱과 비웃음 속에서도 손을 뻗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 후, 죽은 야이로의 딸을 보신 예수님은 죽은 게 아니라 “잔다”라고 말씀하셨다. 영생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죽음을 ‘잠’으로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잠 잔다고 말씀하실 때 사람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곧 예수님의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 소리를 듣고 일어나 걷게 됩니다. 비웃음을 딛고 일어서는 달리다굼의 역사, 이 역사가 여러분 삶에 있길 바랍니다. 엘리야도, 선지자들이 다 죽어 혼자라고 낙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거룩한 7천명 소식을 듣고 다시 힘을 내어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수많은 비웃음과 원망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원망을 들을 때, 또 다른 원망의 대상을 찾게 되고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귀에 들린 대로 행하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며, 부정보다 긍정을 선포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부정적인 말에 굴복되지 않고 주님 손 붙잡고 승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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