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신학’은 경건에 집중... 계몽주의 이후 학문성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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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신학’은 경건에 집중... 계몽주의 이후 학문성 강화
  • 박찬호 교수(백석대학교 조직신학)
  • 승인 2023.03.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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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4)신학하기 vs 신학공부

물리학은 물리현상을 다루는 학문이고 생물학은 생물을 다루는 학문이다. 이렇듯 일반적으로 학문의 이름에는 그 학문의 대상이 그대로 명기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학(theologia)이라고 하는 말은 어원적으로는 신에 대한 학문을 의미한다.

신학은 기독교회의 언어가 아니라 이교 사회에서 사용되던 말을 빌어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방세계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가 흠이 될 수는 없다. 기독교회는 그런 의미에서 방어적이고 수세적으로 외부의 문화를 거부했다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관계를 가지고 소통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신학이라는 말이 기독교회에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세 대학의 설립과 관련이 있는데 그 시기를 보통 1,200년으로 잡는다. 파리나 볼로냐, 옥스퍼드에 세계 최초의 대학이 세워졌다. 그러면 이런 중세 대학의 설립 이전에는 신학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교회에 부속되어 있던 수도원과 같은 곳에서 신학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중세 대학의 설립을 통해 신학교육의 주체가 교회에서 대학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물론 중세에 세워진 대학들은 대부분 교회의 권위 아래 있었기에 대학이 즉각적으로 자율성을 가졌다고 볼 수는 없다. 교회의 관리 감독 아래 대학이 운영되었고 그렇기 때문에 즉각적인 갈등 같은 것이 교회와 대학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학이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기 이전이나 대학이 설립되기 이전 시대에 교육이나 변증 그리고 이단에 대한 응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던 교회의 활동에 신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신학은 그 이름에 걸맞는 학문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상당기간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경건이었고 교회를 떠난 학문으로서의 신학은 성립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 변화가 야기된 것은 계몽주의의 출현과 관련이 있다. 계몽주의는 참혹했던 종교전쟁으로 유명한 30년 전쟁이 끝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된 시기에 등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을 중시하는 합리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신학은 학문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 대학에서 퇴출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모든 권위를 부정하고 편견이나 선입견 없이 중립적인 자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신학은 학문의 자격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신학은 학문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게 되었고 가일층 신학의 학문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신학의 학문화는 여러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 존재한다.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고립될 때 우리는 그것을 게토화라 부른다. 게토(ghetto)는 유대인들이 사는 음울한 거리를 지칭하는 비속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의 게토화는 그런 면에서 일반 학문과 담을 쌓고 신학의 독자성만을 주장하며 고립되어 버리는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학문의 여왕의 지위를 누렸던 중세 시대만큼은 아니어도 신학은 학문 세계에서도 존중을 받아야 한다. 아마도 이런 생각이 작동하여 신학의 학문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신학의 학문화로 인한 가장 큰 폐단은 신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신학에서 신(神)은 없어지고 학(學)만 남게 된 것이다. 신학은 필요하다. 그런데 왜 신학이 필요한지에 대해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관심보다 신학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교회와 무관한 사변적인 신학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늘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신학이라는 말이 기독교회에서 사용되기 전에도 교회에는 나름의 체계를 가진 신학하기를 치열하게 수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활동에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쉽게 신학은 신에 대한 학문이라는 전제가 우리의 생각 속에 묻어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는 그런 면에서 신학을 한다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세상적인 명예를 버리고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신학은 학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기에 우리는 이 복음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이 엄위한 명령 앞에 신학자라고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우리의 신학은 지적인 만족을 넘어서 생명을 살리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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