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난에도 주님과 동행한 아프리카는 우리 부부에게 천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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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고난에도 주님과 동행한 아프리카는 우리 부부에게 천국이었습니다”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3.03.28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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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에 700여 교회 개척한 김종양·박상원 선교사

 

38년 전 아프리카로 선교를 떠난 김종양(오른쪽)·박상원(왼쪽) 선교사는 한국 국적까지 포기하며 아프리카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40년 가까이 현지에서 헌신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로 꼽히는 아프리카 말라위. 이곳에서 38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해 원주민보다 더 가난한 채로 선교에 뛰어든 부부가 있다바로 아프리카 대륙선교회’(Africa Content Mission·ACM) 대표 김종양 선교사와 박상원 사모가 그 주인공이다.

현지인 집에서 더부살이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아프리카 7개국에 교회와 학교, 고아원과 병원을 짓고 구제 사역을 펼쳐온 두 사람. 물론 이러한 기적의 열매를 맺기까지는 국적까지 바꿀 만큼의 귀한 희생과 헌신이 뒤따랐다.

고린도후서 11장에 언급된 바울의 고백처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었다고 말하는 부부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으로 거듭난 뒤 걸어온 은혜의 여정을 들어보았다.

사명자로 인도하신 하나님
김 선교사가 처음 하나님을 만난 때는 청년이던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혼 후 아내와 떨어져 독일에서 산업연수생으로 유학 중이던 그는 우연히 파독 한인 간호사들의 전도를 받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에서 열린 한국병원선교회 수양회에 참석했다. 그리고 마지못해 따라간 이 자리에서 김 선교사는 삶의 전환점을 맞았다.

수양회 첫날 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어요. 이어 병 고침을 받고 환자들을 돌보던 목사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하나님은 살아계시다는 것과 저 목사님처럼 가치 있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최고의 기술을 배워 성공한 사업가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독일에 왔지만, 돈과 명예만을 추구하며 사는 인생은 더 이상 제게 의미가 없어진 겁니다.”

그러자 김 선교사는 이제껏 누리지 못했던 평안과 기쁨을 느꼈다. 이후 가랑비에 옷 젖듯 서서히 성령으로 물들어간 그는 어느 미국인 선교사를 알게 됐다. 그리고 운명처럼 선교사가 되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받았다.

당시 세상에 전문 엔지니어는 많지만 선교사는 부족하다던 미국인 선교사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마침내 저도 선교사가 되기로 결단하고 어디를 가면 좋을까 계속 기도하는데 아프리카가 떠올랐습니다. 가장 힘든 지역이자 나를 꼭 필요로 하는 곳이란 점에서 제게는 최고의 선교지였죠.”

아프리카 선교사에게는 영어가 필수였기에 김 선교사는 곧장 영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웨일스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1985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세계선교회와 독일병원선교회의 파송으로 아프리카에서도 제일 빈민국인 말라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39세 뒤늦은 나이에 수중에 가진 것이라고는 성경책 한 권과 600달러가 전부였다.

이 같은 소식은 고스란히 편지에 담겨 한국에서 홀로 아들을 키우고 있던 아내 박 사모에게 전해졌다. 그 역시 지난 8년간 김 선교사가 편지로 열심히 전도한 덕분에 교회는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유학만 끝나면 금의환향한 남편과 함께 행복하고 풍족하게 살 줄로만 알았던 박 사모에게 아프리카 선교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남편이 편지로 신학을 하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아프리카로 떠날 때까지 저는 펄쩍 뛰며 완강히 거부했어요. 그렇지만 끊임없는 설득에 제 마음도 서서히 열리더라고요. 특히 말라위에 먼저 도착한 남편이 이곳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다. 아프리카의 말라위는 스위스의 알프스라고 얘기하는데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 이토록 오랜 시간 나를 혼자 살게 하셨는데 또 고생을 시키시겠어?’란 생각도 들었죠.”

 

원주민보다 가난한 선교사
박 사모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아홉 살배기 아들의 손을 잡고 아프리카 말라위로 떠났지만 현실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후원단체였던 독일병원선교회는 무슨 영문인지 말라위에 온지 두 달이 넘도록 단 한 푼도 후원금을 보내주지 않은 상황.

지낼 곳이 없던 김 선교사는 현지 교회 원주민 집사의 가정집에 얹혀 살면서 개미 섞인 식빵과 염소고기 한두 조각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밤에는 들끓는 모기떼와 도마뱀으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체격 좋던 김 선교사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최소한의 생활조차 영위하기 어려운 극심한 궁핍에 김 선교사는 기도로 부르짖었다.

하나님께 백일 때까지 약속한 선교비를 안 보내주시면 떠나겠다고 했어요. 제가 떠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라고 으름장도 놓았죠. 하지만 백일 안으로 선교비를 보내주신다면 제 국적도 바꾸고 평생을 아프리카에서 헌신하겠다고 서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신실하게 응답하셨다. 정확히 백일째 되던 날 아침 사서함에 500달러 수표 한 장이 날아든 것. 알고 보니 사서함 번호가 2836이었는데 독일에서 2846이란 잘못된 주소로 후원금을 보냈던 것이다.

다행히 우체국 직원이 그동안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된 우편물들을 잘 보관해둔 덕분에 김 선교사는 이날 500달러 두 장을 더 건네 받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니, 하나님은 백일간 열정만 가득했던 저를 철저히 다듬고 훈련시키셨어요. 특히 본인도 어려운 형편에서 집과 먹을 것을 내어주며 저를 사랑으로 섬겨준 원주민 집사님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죠. 처음에는 질병이 두려워 안수기도조차 꺼려하던 제가 연약함을 회개하고 원주민들과 점차 하나 되어가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김 선교사는 아프리카의 병자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사역에 전심을 다했다. 특별히 기도를 통해 육체적 정신적으로 고통 받던 말라위 사람들이 치료받는 신비한 경험을 하면서 그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사역에 박차를 가했다.

한편, 박 사모 또한 숱한 시련을 견뎌내야 했다. 알프스 같다던 선교지는 벌레가 득실대는 빈민촌인 것도 모자라 복면강도의 침입으로 공포에 떨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무엇보다 영양실조로 버짐이 핀 아들의 얼굴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그런데도 매일 같이 현지인들을 집으로 데려와 음식을 나누는 남편이 한없이 야속했다. 자연스레 부부간 다툼이 잦아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박 사모는 말라리아와 황달병에 걸렸다. 병원의 치료도 잘 듣지 않고 피골이 상접해 거의 다 죽어갈 무렵 하루는 작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내 아들에게 우유 한 컵 계란 한 알도 제대로 못 먹이는 게 선교냐, 켜켜이 쌓인 온갖 설움과 힘듦을 눈물로 쏟아냈다.

기도하는데 갑자기 딸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아프리카로 불렀다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어 내가 너를 사용할 것이다. 그러나 먼저 네가 거듭나야겠다고 말씀하시는 거에요. 그러면서 아프리카 아이들에게는 빵을 얇게 썰어주고 제 아들에게는 두껍게 썰어서 먹이는 등 지난날 제 잘못된 행동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습니다.”

너무 부끄럽고 괴로워서 밤새도록 회개하던 박 사모에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네가 사랑하는 네 아들을 사랑해서 내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에 달았단다.”

이날을 기점으로 박 사모는 황달병과 말라리아 약을 전부 버렸다. 죽어도 감사, 살아도 감사란 심정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하루 두 끼 백일 금식을 이어가는 가운데 모든 병이 기적처럼 치유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40세에는 건강하게 둘째 딸을 출산하는 축복을 맛보기도.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로도 우리의 형편은 여전했어요. 하지만 늘 기쁨이 가득했죠. 그제서야 하나님이 저를 남편과 동역하는 선교사로 사용하기 시작하셨고요. 사역 초반 말라위는 아프리카의 알프스라던 남편의 말이 정말 거짓말 같았지만 이제는 잘 압니다. 내 마음이 천국이면 그곳이 진짜 알프스라는 사실을요.”

약한 자로 이루신 기적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는 성경 구절처럼, 하나님은 연약하고 철 없던 자녀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거듭난 부부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다.

먼저 부부는 1985년 아프리카 대륙선교회를 설립하고 1989년부터는 말라위·에스와티니·모잠비크·콩고·잠비아·레소토·남아공화국 등 아프리카 7개국 정부에 선교회를 등록했다.

이를 통해 남아공화국에 임마누엘신학교, 에스와티니에 초중고등학교와 사임기독고등학교, 모잠비크에도 초중고등학교 및 임마누엘소망국제신학교를 세워 이제껏 8,000여명의 청년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길러냈다. 지난 40년 가까이 아프리카 7개국에 무려 700여 곳의 교회를 개척하고 250여개 교회를 건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덕분이다.

또한 부부는 현지 자립선교를 위해 남아공화국 신학교 부지에 마카다미아 농장을 개간했다. 모잠비크에도 개발되지 않은 8만평의 부지에 바나나 농장을 일구어 각 선교지가 재정적 자립을 이룰 수 있도록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무엇보다 부부는 전쟁과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위해 고아원을 운영하고, 에스와티니에 최초의 기독의과대학교를 세워 낙후된 의료발달에 기여하는 혁혁한 공을 쌓았다. 현재 약학·간호학 등 보건계통의 7개 학과가 개설돼 있으며, 올해 의과대학도 문을 열 예정이다.

김 선교사는 “2013년 개강 이래로 1,000여명의 졸업생이 아프리카 각 지역의 국립·사립 병원에 취업해 일하고 있다“3년 전 우리 부부가 코로나에 걸려서 입원했을 때 병원 곳곳에서 약사·임상병리사·방사선사 등으로 일하고 있는 기독의대 졸업생을 만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받고는 얼마나 큰 보람을 느꼈는지 모른다고 전했다.

이어 이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정부에서 건축부지와 운영비를 지원해줬기 때문이다. 더불어 후원에 동참해준 수많은 개인 및 교회들, 개미군단이 있었다우리는 건축한 교회나 학교의 이름을 지을 때 후원교회명을 사용하거나, 후원자의 성명을 명패에 새겨 건물에 부착하고 있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전했다.

부부는 에스와티니에 최초의 기독의과대학교를 세웠다. 사진은 기독의대 전경.
부부는 에스와티니에 최초의 기독의과대학교를 세웠다. 사진은 기독의대 전경.

한편, 김 선교사와 박 사모는 작년 <하나님, 살리시든지 데려가든지 하세요!>란 제목의 책을 펴내고 지난 40년 가까운 주님과의 동행기를 진솔하게 털어놓았다. 또 그간의 선교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제9회 연세대 언더우드 선교상, 2019년 에스와티니 교회협의회 교육선교 공로상, 2022년 이자익목회자상 등을 수상했다. 마치 하나님의 따뜻한 위로와 격려 같았다.

박 사모는 아프리카 선교를 하면서 온갖 핍박과 모함을 받았다. 한국에서 온 목회자가 어린아이의 피로 성찬식을 한다는 한 사교집단의 음해로 추방 위기에 몰리기도 하고, 풍토병과 폐병 등으로 생사의 기로를 수시로 넘나들었다. 그야말로 주님 손에 이끌려 죽음의 아골 골짝으로 돌진하는 나날들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한국 국적까지 포기하며 아프리카 영혼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품을 수 있었던 동력에 대해, 두 사람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아프리카에 온 후 여러 시련 속에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 119:71)란 말씀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계획하실 때마다 고난을 통해 우리를 기도로 준비시키시고 동역자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신 후 넘치는 은혜를 주셨지요. 이는 약한 자를 강하게 만드셔서 사용하신 하나님의 방법이기도 했습니다. 주님이 부르신 그날 천국에서 내 충성된 종이란 칭찬과 상급을 얻길 꿈꾸며, 앞으로도 더욱 겸손함으로 순종하며 나아갈 것입니다.” 

남아공화국 임마누엘 신학교에서 현지인 청년들이 김 선교사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다.
남아공화국 임마누엘 신학교에서 현지인 청년들이 김 선교사의 설교를 경청하고 있다.
마카다미아 농장 모습.
마카다미아 농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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