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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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셋째 주 하늘 문을 여는 가정예배
  • 운영자
  • 승인 2023.03.15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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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종류의 사람들

누가복음 9:57~62
찬송: 191장

본문은 주님을 따르려는 세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과정 없는 영광만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57~58).
마태복음을 보면 이 사람은 서기관이었습니다(마 8:19). 학식, 재력, 권력에 있어서 유대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선 것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는 영광을 생각하기에 앞서 희생과 헌신이 먼저이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의 일보다 세상의 일을 중요시 여기는 자입니다(59~60).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고 명하십니다. 신앙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의무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요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의 길의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데 있음을 말해줍니다.
셋째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입니다(61~62). 주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 모두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뒤를 돌아보지 않고 따른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세상일이 아닌 주님의 일을 중요시 여기게 하옵소서!

 

하나님의 사람 요셉

창세기 37:12~17
찬송: 220장

오늘 본문에서는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형들의 안부를 알아보고 오라는 심부름을 보내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부모님 말씀에 순종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요셉은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은 순종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을 선택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일찍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형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거기에다 꿈을 꾼 사건까지 겹치며 더더욱 형들에게 미움을 받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요셉에게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떼들을 돌보고 있지 않느냐. 너는 가서 형들이 잘 있는지 안부를 알아오라”고 분부하자 요셉은 “네 그리하겠나이다”하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로 세겜으로 떠났습니다. 그런데 세겜에 도착하여 보니 형들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겜 사람들에게 형들에 대하여 물어보니 이미 도단 지역으로 떠났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약 30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로부터 형들의 안부를 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기에 도단으로 길을 떠납니다. 요셉은 맡은 바 임무에 대한 책임감과 성실함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처럼 합당한 사람을 찾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찾으시는 준비된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하옵소서.

 

성령 임재와 예수의 증인으로

사도행전 1:8
찬송: 505장

알아도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성령 받고, 본인의 증인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순종한 사람들은 기도했고, 성령 충만을 받았습니다. 복음 전파자들이 되었습니다. 성령 임재와 권능 받음은 성령 충만으로, 예수의 증인 됨은 복음 전도로 자연스레 이어집니다. 성령 충만과 복음 전도는 교회에 절대적 영향을 줍니다.

이는 사도행전의 두 가지 큰 흐름이기도 합니다. 복음 전파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에서, 사마리아에서, 땅끝에서 실시되었습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통해서 데오빌로에게 예수를 전하며 증인이 되었습니다. 그 자신도 성령을 받았고 증인으로 산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나타낸 것입니다. 데오빌로에게도 요구했을 것입니다. 성령 받아야 한다고, 예수의 증인이 돼야 한다고, 이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신자의 삶이라고 본문을 통해서 요구했을 것입니다.

너무너무 잘 아는 말씀이지만 내 삶에서 응답되고 실천되는 말씀이 돼야 합니다. 우리도 역시 성령 충만해야 하고 예수님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장소가 어디든, 밤이든 낮이든, 신분을 초월하고,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에 대한 좋은 소문을 내며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 충만과 예수님의 증인 된 삶이 우리의 일상이 되는 것은 은혜요 축복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세요! 우리를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게 해 주세요!

 

축복의 길

갈라디아서 3:14
찬송: 488장

지금까지 에벤에셀의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가운데 우리를 선택하시고 여러 각도의 여정 속에서 훈련(연단)을 시키신 후 그릇이 될 때 하나님이 예비한 모든 역사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 소원이신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의 계획을 위해 우리를 부르시고 교회를 세워주셨고 여기까지 든든히 서 왔습니다.

성경에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①모든 민족을 이루기 위해 ②창대케 하기 위해 ③복의 근원 자가 되기 위해 ④영적 권세를 주기 위해 ⑤모든 족속 중 너로 인해 복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어떤 길을 갔을까요?

첫째 변화의 길입니다. 질문도 없이 부모가 있는 고향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죄악의 삶(세상 쾌락, 즐거움)에서 떠나야 합니다. 또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변화에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옛 습관, 원망, 불평, 연약한 믿음을 버리고 아브라함같이 하나님 말씀에 아멘의 신앙으로 변해야 합니다.

둘째 순종의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웠으나 순종하지 않으므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고 그를 버리셨다고 하였습니다. 반면 순종한 아브라함에게는 위의 5가지 축복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셋째 희생과 헌신의 길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전부 드리는 온전한 희생과 헌신을 하였을 때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기도
나를 통하여 후손과 후배 신앙인이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소서.

 

하늘에 소망을 두라

골로새서 3:1~2
찬송: 491장

본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로서 우리가 어떤 자세,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삶의 방향에 대한 답을 명확히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땅입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심과 생각은 땅에 있을 것입니다. 땅에 머물러 있으면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땅의 삶도 만만치 않고 모두가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의 관심과 생각은 늘 위의 것에 있어야 합니다. 하늘의 가치를 알고 하늘에 소망을 두는 성도, 하나님은 그 사람을 오늘도 찾으십니다. 

땅의 것은 일장춘몽과 같이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결코 영원할 수 없습니다. 땅에서의 부와 명성, 지위와 명예 그리고 권력, 그것들이 아무리 많고 크다 할지라도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위의 것은 영원합니다. 예수님도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심의 대상은 땅이 아닌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오직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생각은 땅의 것입니까? 위의 것입니까? 일시적인 것입니까? 영원한 것입니까? 세상 헛된 것에 소망 두지 않고, 하늘의 가치를 알고 하늘에 소망을 두는 삶으로 승리하는 성도가 됩시다.

•오늘의 기도
하늘의 가치를 알고 하늘의 소망 두고 살게 하옵소서!

 

치유의 문 열기

마태복음 18:21~22
찬송: 286장

본문에서 베드로는 용서의 횟수를 말하지만 예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이야기를 통해 용서의 마음을 말씀하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가 주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탕감 받았지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감옥에 넣어버렸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인의 용서와 빚의 탕감을 실감하지 못한 채 여전히 빚진 자의 무거운 마음을 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 모든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인 된 마음으로 타인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용서의 세가지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 죄를 기억하시도 않는 것이지만(히 18:12) 인간인 우리의 용서는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용서는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입니다. 형들에 의해 모진 세월을 산 요셉이 훗날 형들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나를 먼저 이곳에 보낸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용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떠나 하나님과의 관계로 연관 짓는 새로운 시각을 의미합니다. 셋째, 용서는 남을 위해서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가해자는 상처준지도 모르고 잘 사는데 피해자인 나만 고통스럽게 산다면 얼마나 비참한가! 때문에 나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고, 특별히 ‘내가 잘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임을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이삭처럼 넉넉히 용서할 수 있는 모든 성도들이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용서하고 용서받는 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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