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딱 한번 언급한 ‘신학’, 지금의 신학과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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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이 딱 한번 언급한 ‘신학’, 지금의 신학과 달라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3.03.14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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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
2) 신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정당한가?

여호와의 증인은 대표적으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논리는 간단하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 없는 삼위일체 교리를 가톨릭교회에서 만들어냈다는 것이 여호와의 증인의 기본적인 주장이다. 다른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여호와의 증인도 성경의 권위를 매우 강조한다.

미국 유학 시절 여호와의 증인을 만나 1시간여 토론을 하며 논쟁을 했는데 그때의 감회는 “같은 성경을 이렇게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라는 것이었다. 성경을 가지고 토론을 하는데도 무언가 서로 초점이 맞지 않고 양손바닥이 마주쳐지지가 않고 헛도는 느낌이었다. 옛날 어른들이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아 영이 다르구나.”

삼위일체(Trinity)나 섭리(providence)라고 하는 말이 성경에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삼위일체나 섭리에 대한 교리는 성경적이다. 그래서 어떤 말이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로 그것이 성경적이냐 그렇지 않으냐를 묻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볼 수 없다.

안상홍 증인회로 알려진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성탄절을 부정한다.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부활절은 유월절과 관련하여 비교적 정확하게 특정하여 지킬 수 있다. ‘춘분 지난 만월 후 첫 번째 주일’이 부활절이 된다. 구약의 달력이 우리가 사용하는 음력이기 때문에 부활절은 3월 말에서 4월 중순을 왔다 갔다 한다.

이에 비하면 성탄절은 날짜를 특정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12월 25일로 성탄절을 지키는 것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한 날을 정하여 주님의 나심을 기념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크게 문제 삼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실제로 청교도들 중 일부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교회의 주장과 같이 성탄절을 지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가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탄절이 성경에 없다고 지키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교회가 성탄절 비슷한 시기에 안상홍 탄신일을 지킨다는 것이다. 성탄절을 성경에 없다고 지키지 않으면서 성경에 없는 안상홍 탄신일을 지키고 있는 이런 모순에 대해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

‘신학’(theology)이라고 하는 말은 헬라의 철학자 플라톤(Plato, 주전 427~347)이 가장 먼저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도 딱 한번 사용했다고 하는 이 신학을 지금의 신학과 같은 의미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신학이라는 말은 성경적인 용어가 아니라 이교 사회에서 사용되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신학이라는 용어를 기독교회가 차용한 것이다. 자연히 그 사용이 정당한가라고 하는 질문이 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서 교회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이다. 이 말을 어원적으로 분석하면 불러냄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으로부터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의 집단이 교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에클레시아가 교회에만 적용되던 말이 아니라 일반적인 단체에도 사용되던 용어였다는 사실을 통해 그 설득력을 잃게 된다. 예컨대 사도행전 19장 39절에서는 에클레시아를 ‘민회’로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라는 헬라어도 이교 사회에서 사용되던 용어를 빌어 사용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신학이라는 이교의 용어가 기독교회 안에서 일반화된 것은 12세기 중세대학의 설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학이 일종의 고등학문으로 법학이나 의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대학의 분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물론 17세기 프란시스 튜레틴(1623~87)이라고 하는 사람의 <변증신학강요>에 여전히 신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토론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신학이라는 말의 사용에 대한 논란이 그때까지도 완전하게 해결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듯 신학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독교 내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신학에 해당하는 표현은 “비밀한 지식”(고전 2:7), “바른 말씀들의 형태”(딤후 1:13), “경건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딛 1:1) 등을 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학은 성경에 “문자 그대로 새겨진 용어”는 아니라고 할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학이라는 말은 기독교회에서 사용할 수 있는 용어다. 다만 이교 사회의 용어였던 신학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좀 더 다른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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