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높고(尊) 무겁게(重)’ 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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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높고(尊) 무겁게(重)’ 여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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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2.14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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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용의 감사행전(31)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얼마 전 감동적인 사진 하나를 봤다. 미국 프로풋볼 경기 중 한 선수가 쓰러졌다. 갑자기 심장이 멈춘 것이다. 경기는 중단되었고, 의료진이 달려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다. 그러자 양팀 모든 선수들이 그를 둘러싸고 앉았다. 사진을 보면서, 이들이 기도를 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관중들의 시선과 중계 카메라로부터 쓰러진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오래 전 호주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다. 어떤 사람이 전차에 치였다. 경찰과 구조대가 달려오더니 사고 현장에 가림막부터 쳤다. 비참한 사고자의 모습을 행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태원 참사 때, 거리에 나열된 시신들의 처참한 모습이 신문, 방송과 SNS를 통해 마구 전파되었다. 속옷이 벗겨진 모습도 보였다. 워낙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겠지만, 누군가 시신들을 좀 가려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이런 일까지 겪은 유족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안전’만 없었던 게 아니라 ‘존중’도 없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다고 한다. 그들의 수행 노력을 살펴보면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도무지 흉내를 내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그러니 함부로 그들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당시 유대교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율법을 얼마나 완벽하게 지키느냐였다. 그들에게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나’”가 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나’”를 강조하셨다. ‘나’보다 ‘이웃’에 방점(傍點)을 두셨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로 인해 예수님은 율법주의자들로부터 수없이 공격을 받으셨다. 안식일 논쟁도 그 중 하나다. 이러한 모습은 지금도 한국교회 내에서도 자주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율법의 핵심으로 요약해주셨다(마 22:36~40). 때로는 이웃 사랑이 곧 하나님 사랑이라고까지 강조하셨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는 걸 ‘신앙(信仰)’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사는 걸 ‘신앙생활(信仰生活)’이라고 한다. ‘신앙’이 ‘아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은 ‘하는 것’이다. 자주 강조하지만,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는 것도 중요하다. 두 가지가 합쳐져야 신앙생활이 완성된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독실한 그리스도인인지를 알아보려면, 그가 어느 교회 장로인지 권사인지가 아니라 이웃을 얼마나 사랑하며 사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이걸 비신자들은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여러 여론조사 결과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하나님은 ‘나’만 사랑하실까? ‘신자’만 사랑하실까?

이슬람 사원을 건축 중인 대구의 어느 동네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사원 앞에서 통돼지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중앙일보, 2022. 12. 16.). 이 주민들은 사원 공사장 앞에서 40~50명이 먹을 수 있는 통돼지를 숯불에 구워 파티를 열었다. 이슬람권에서는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죄악으로 여긴다. 세월호 유족들이 광화문 추모 공간에서 단식농성을 할 때, 바로 옆에서 피자 100판을 시켜 먹으면서 그들을 조롱하던 이들도 있었다(2014년).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이들 집단에 그리스도인들이 없어야 할 텐데…” 하며 염려를 하게 된다.   

사랑은 다른 사람(이웃)을 높고 무겁게 여기는 ‘존중(尊重, Respect)’에서 시작된다.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약자(弱者)들이 있다. 가난한 이들, 몸이 약한 이들, 장애인들, 마음이 아픈 사람들, 인권을 유린당하며 사는 이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탄압을 받는 이들… 사람들은 이들을 ‘낮고 가벼운 사람’ 취급을 한다. 교회는 이들을 존중하며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나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지구촌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또 신자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비신자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의인만 사랑하시는 게 아니라 죄인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사랑의 씨앗은 존중이다. 존중이라는 씨앗이 사랑이라는 열매를 맺는다.

오늘도 언론의 보도, SNS에는 타인을 무시하고 폄하하고 혐오하고 조롱하는 표현이 차고 넘쳐난다. 나아가 근거 없이 무고하고 모함하고 정죄하는 거짓 증거가 미디어를 통해 날마다 쏟아져 나온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 교회도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마태복음 7:12, 새번역)

기독교는 이타주의(利他主義) 종교다. 우리부터 만나는 모든 이들을 좀 더 ‘높고(尊) 무겁게(重)’ 여기자. 그래야 남들도 나를, 우리를 ‘높고(尊) 무겁게(重)’ 여겨주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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