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세 촌장님 방에 매일 손님이 찾아오는 비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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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세 촌장님 방에 매일 손님이 찾아오는 비결은?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3.02.14 2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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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마을 촌장 김성수 은퇴 주교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 지내…최근 헌정 문집 발간
윤여정 배우, “주교님은 누구도 가르치려 하지 않은 분”
‘발달장애인의 아버지’, 6.10 항쟁 당시 ‘민주화’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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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1월의 어느 날 김성수 주교를 만나기 위해 강화도 우리마을을 찾았다.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겨울날이었다. 영하의 매서운 날씨임에도 솜이불을 덮은 듯 따사롭게 느껴지는 그런 날이었다. 강화도 온수리에 자리 잡은 발달장애인 직업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의 설립자인 김성수 주교(94세,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도 그랬다. “어른이 없다”고들 하는 시대에 이런 어른이 한 명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느낌을 인터뷰 내내 느낄 수 있었다. 

‘우리마을 촌장’이라는 호칭을 사랑하는 김 주교는 ‘욕쟁이 신부님’이라는 잘 알려진 별명과 달리 시종일관 유쾌하고 다정하고 따뜻했다. ‘촌장님 방’에는 벽면 가득 찾아온 손님들과 찍은 사진, 방명록 등으로 장식돼 있다. 유명한 기업가부터 정치인, 예술인들의 이름도 있었지만, 설날에 찾아왔던 발달장애인 가족 등 평범한 사람들의 사진과 이름으로 빼곡했다. 

촌장님과 함께 자리에 앉자 우리마을 직원이 익숙한 듯 사진부터 찍는다. 이 사진은 헤어질 때 예쁜 사진 틀에 담겨 기자의 손에도 전달됐다. 한 번의 만남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었다. 통창을 통해 들어오는 새하얀 풍경을 벗 삼아 우리마을 원장 원순철 신부까지 셋이서 도란도란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찾아오는 손님이 많은 촌장님

“아흔네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정정해 보이신다. 특별한 건강 비법이 있느냐”는 기자의 말에 김 주교는 “특별하게 하는 건 없고 남들처럼 아침에 일어나면 이 닦고 세수하고 그렇게 평범하게 산다”고 느긋하게 답했다. 이어 “매사에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그리고 남 탓하지 않는다. 그래야 다툼이 적다”고 했다. 그러면서 90대가 되면서 바뀐 일상들을 유쾌하게 풀어놓았다. 

“80대 후반만 하더라도 사무실에 일찍 나왔어요. 아흔이 넘은 뒤에는 안 그럽니다. 아무것도 아닌 늙은이가 먼저 나오면 직원들이 눈총을 쏘는 것 같아. 요즘은 느지막하게 나옵니다. 오늘은 손 기자가 온다고 해서 일찍 나오느라 아침잠을 손해 봤어.”

김 주교는 평소에 운전을 하지 않는다. 자전거도 “위험해서” 안 탄다. 그렇다 보니 그리운 사람을 만나려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상책이다. 다행히 워낙 발이 넓은 김 주교인지라 코로나19 전까지는 그를 찾아오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었다. 

“오늘처럼 와서 만나고 싶다는 사람들 있으면 이야기도 나누고 점심도 먹고 하는데, 코로나 이놈 때문에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일상이 바뀐 것 같아요. 찾아가기도 그렇고, 찾아오기도 그렇고. 하나님은 서로 만나기를 자주 하라고 하셨는데 한동안 그게 안 된 거지. 운전을 안 하니까 자유스럽지가 않아요. 누가 나를 태워가야 하는데,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도 각자 할 일이 있는데 내가 시간 뺏기도 그렇고 해서 괴롭죠.”

최근 들어 코로나 영향이 줄어들면서 그나마 만남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김 주교에게 헌정하는 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이 나와서 모처럼 그리운 얼굴들을 한꺼번에 만났다. 서울대주교좌성당에서 열린 헌정문집 북콘서트에서는 이금희 아나운서가 사회를 봤고, 제93회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 윤여정 배우와 가수 윤형주 장로 등이 축사를 전했다. 

이 자리에서 윤여정 배우는 김 주교를 “어른 사람, 누구도 가르치려 하지 않은 분”이라며 존경과 사랑을 표했고, 윤형주 장로는 “1969년경 인천성공회 담임 신부로 계실 적에 우리 쎄시봉 무리들이 주말이면  점령군처럼 총각 신부님 방으로 찾아가곤 했다”고 회상했다. 윤 장로는 특히 아버지의 간섭을 피하기 위해 성공회 교회로 옮기겠다던 자신에게 “한 가정의 신앙은 가족 모두 일치되는 것이 성경적”이라며 돌려보낸 일화를 소개하면서 “때로는 친구처럼, 자상한 형님처럼 모든 실수를 덮어주는 김 신부님의 인격과 따뜻한 마음에는 성경이 가르쳐 주는 바른길과 지혜가 담겨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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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주교는 우리마을 촌장이라는 호칭을 사랑한다. 기자가 찾은 날도 ‘촌장’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모자를 잊지 않았다. 김 주교는 기독교연합신문 애독자임을 밝히며 새해 독자들에게 전하는 덕담으로 “기독교연합신문을 많이 읽으라”고 해 웃음을 자아냈다. 

 

94세 촌장님도 고민이 있다

요즘 김 주교의 머릿속에는 ‘발달장애인 양로원’ 건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하다. 평생 발달장애인들과 더불어 살아온 그가 마지막으로 해결하고 싶은 숙원사업이다. 우리마을 원순철 원장도 옆에서 거들었다.

“직업재활시설인인 우리마을에도 직장처럼 정년이 있습니다. 만 60세가 지나면 은퇴를 해야 하죠. 비장애인들에게 은퇴 후 대책이 ‘골칫거리’라면 발달장애인들에게는 ‘생존’이 걸린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65세가 넘으면 제도적으로도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구분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시설 관계자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없는 행정이죠. 연구자들은 발달장애인들의 노화 현상이 마흔 살부터 찾아온다고 합니다. 발달장애인 노인요양법이 별도로 필요합니다. 지난해에도 우리마을에서 한 분이 은퇴했습니다. 미혼인 60세 발달장애인 노인에게 돌봐줄 누가 있겠어요. 그나마 홀로 된 여든 살 형수님이 계셔서 그분에게 갔죠. 이런 상황은 누가 봐도 비정상입니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필요합니다.” 

김 주교는 발달장애인과 함께 한 일생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무한한 애정을 드러냈다. 

“예수께서 살아서 3년 동안 그렇게 어려운 사람 편에 서서 일을 많이 하셨지요. 저는 그저 예수님의 삶을 어렴풋이 흉내 내려고 애쓴 것뿐인데, 우리 발달장애인 친구들이 저더러 고맙다고 해주니 제가 오히려 더 고맙습니다. 우리나라가 많이 좋아지면서 발달장애인들의 삶도 많이 바뀌었어요. 그러나 아직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천국이 임하기를 소망하며 삽니다. 그런데 나만 잘 산다고 이 땅에 천국이 임하나요? 나도 변하고 세상도 변하고 발달장애인도 변해야 ‘땅의 하늘나라’가 이뤄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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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주교는 시종일관 농담을 던졌다. 94세 은퇴 성직자의 위트에 대화 자칫 딱딱할 수 있는 인터뷰 분위기는 한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주기도문에 ‘우리’가 몇 번이나 나올까

김 주교는 한해 한해 나이를 먹어가면서 ‘주기도문’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닿는다고 했다. 특히 주기도문 속에 등장하는 ‘우리’라는 단어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그 짧은 주기도문 속에 ‘우리’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옵니다. 주님께서 왜 그렇게 ‘우리’를 강조했을까요. 내 아버지가 너의 아버지라는 뜻 아닙니까. 우리 한국교회가 다 ‘우리’라면 조그만 교회에서 목사가 고생하고 월급을 조금 받으면 큰 교회가 도와주고 월급도 좀 주고 하는 게 ‘우리’ 아닐까요. 우리가 우리라면 겨울에 큰아들은 덧신 신기고 작은아들한테만 운동화 신기나요. 어머니 반찬도 똑같이 나눠 먹어야 우리 어머니지 큰놈만 많이 주면 너희 어머니 아닙니까. 교회뿐 아니라 우리 사회도 ‘우리’가 부족하니까 갈등이 심한 것 같아요. 정치하는 사람들 우리가 보기엔 딱해요. 저렇게 뜻이 안 맞으니 무슨 일을 하겠어요. 그래서 교회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모름지기 열심히 그저 어려운 이웃과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만 잘 지키면 정치도 자연스럽게 좋은 길로 가지 않을까요. 우리 교회가 보여준 게 없으니 그렇게 어려운 정치들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김 주교는 이 생각을 몸소 실천해 왔다. 의지해 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곁을 내줬다. ‘우리’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를 수식하는 많은 업적에 관해 묻자 ‘내가’ 한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고 응수한다. 김 주교는 6.10 민주 항쟁 당시 호헌 철폐를 위한 미사를 집전하고, 경찰을 피해 도망쳐 온 시민사회 대표들과 운동권 대학생들에게 숙식을 제공, 주교 집무실을 대책본부로 쓰도록 배려한 인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당시 학생들이 성명을 발표한다고 하니 우리 교회뿐 아니라 모든 교회가 출입금지를 해서 난리가 났었어요. 박 신부라는 분이 사건 일주일 전에 학생들을 다 데리고 교회로 왔어요. 여기서 우리가 경찰들 못 들어가게 할 테니 들어와 있으라고 하자고, 성명도 발표하게 하자고 하기에 그러라고 한 것뿐입니다. 박 신부라는 분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어요. 그분이 한 겁니다. 그런데 박 신부는 어디 가고 김 주교만 잘했다고 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를 지키느라 정작 가족들에게 미안한 일도 많았다. 

“하루는 우리 애들이 ‘아빠 우리집이 여관이야?’ 그래요. 아내도 서양(영국) 사람이 한국까지 와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라요. 지금 와서 자식들에게, 아내에게 아주 미안한 마음이 들고, 속으로 용서를 빌죠. 

김 주교는 독자들에게도 “하루 세 번만 주기도문을 외우자”고 권면했다. 그중에서도 ‘우리’라는 두 글자를 가지고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살면 세상이 좀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했다. 끝으로 우리 사회를 둘러싼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참고’ ‘견디자’고 조언했다. 김 주교는 “참고 기다리면 좋은 세상이 반드시 온다”며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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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간된 김성수 주교 헌정문집 ‘우리 마음의 촌장님’

 

한편 김성수 시몬 주교는 1930년 강화군 온수리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신앙을 계승한 성공회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울 교동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배재중학교에 진학했고, 1957년 단국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학생시절 폐결핵에 걸려 학업을 중단했으나, 기적적으로 병이 나아 연세대학교 신과대학과 성미가엘신학원(현재 성공회대학교)에 입학했다. 하루종일 일해도 꽁보리밥 한 그릇을 겨우 먹을 수 있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면서부터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고, 그러한 생각은 1964년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은 후 1974년 대한민국 최초의 발달장애인 특수학교 성베드로학교 교장을 봉사하는 원동력이 됐다. 1984년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장, 1990년 대한성공회 초대 관구장으로 서품받았으며, 선친으로부터 받은 강화도 온수리에 3,000평 대지에 발달장애인 작업재활시설인 우리마을을 설립해 장애인들이 일할 곳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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