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에 배타적인 한국, 왜 ‘친기독교적 민족주의’를 택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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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에 배타적인 한국, 왜 ‘친기독교적 민족주의’를 택했나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2.08.30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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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10주년 기념 심포에서 백석대 이상규 교수 발표
“열강에 침략당한 나라들 ‘반기독교적 민족주의’ 성향 띠는 것과 대조적”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지난 26일 충현교회 베다니홀에서 열렸다.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10주년 기념 심포지엄이 지난 26일 충현교회 베다니홀에서 열렸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열강의 침략을 받은 여러 나라가 반기독교적 성향을 보인 것과 달리 한국만은 기독교적 민족주의를 형성하게 된 까닭은 뭐였을까.

한국장로교회총회 설립 11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백석대 이상규 교수(역사신학)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일제하에서 큰 수난을 겪으며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했던 이유를 분석했다. 이 교수는 “1894~1895년 벌어진 청일전쟁을 경험한 이후 한국교회가 처음으로 수적 성장을 경험했다”며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는 서양기술의 수용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한 결과 기독교를 통해 서구와의 접촉을 의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호주의 역사가 케네즈 웰스가 국가적 위기라는 정치적 환경에서 기독교를 수용하여 이를 타계하고자 했던 한국인의 집단적 의식을 ‘자강 민족주의’라고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규 교수는 “한국에서의 기독교 수용은 인접한 중국이나 일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급성장이었다”며 “우리나라는 외래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이었으나 기독교의 수용만은 급진적이었다. 이것은 기독교 전래시의 조선의 정치적 상황과 사회적 배경과 깊이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흔히 한국교회의 성장을 선교정책설, 정치사회적 환경론, 한국인의 종교적 심성론 등으로 설명해 왔지만, 한국인이 일제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는 정치환경에서 유래한 ‘민족주의’에 기인한다는 해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면서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아닌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았다는 사실은 교회 성장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당시 기독교 국가의 식민통치를 받았던 나라들은 민족주의 형성에서 반기독교적인 성격을 보였다. 대표적인 나라가 300년간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던 인도네시아다. 한국은 정반대였다. 일본과 소련, 중국 등 인접한 강대국들의 침략야욕 앞에서 기독교를 통로로 자강 의지를 키워가지 않으면 안 됐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당시 한국인에게 기독교는 외래적인 것이라는 배타적 거부에서 기독교를 통한 근대성을 인식하게 했던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는 환영을 받았고 한국에서의 민족주의는 친기독교적인 성격을 띠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일제하에서 큰 수난을 겪으며 생존의 투쟁을 해야만 했습니다. 1910년 당시 총독부는 조선에는 20만의 신도, 1,900여 개의 집회소, 270여 명의 외국인 선교사, 2,300여 명의 조선인 교직자가 있다고 파악했습니다. 그밖에도 조선 기독교회는 많은 병원과 고아원을 가진 조직이었고, 신앙이라는 견고한 유대로 결합하여 구미의 선교사들에 의해 세계 여론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국권, 민권의 회복을 열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으므로, 태극기가 가장 많이 게양되는 곳은 교회와 기독교인의 집이라고 보고 될 정도로 교회를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후한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일제는 강압 통치 과정에서 교회에 대한 탄압을 가중했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수용하든지 거부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됐다. 장로교회는 이에 저항했지만, 강요가 심해지자 점차 그 의지가 약화됐다. 1938년 2월 9일 전국에서 교세가 가장 큰 평북노회가 “신사는 국가의식이므로 참배를 허용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당시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일제의 요구에 굴복했다.

그러나 전국에서 신사참배 반대 운동도 거세게 일어났다. 신사참배 거부자들은 체포 구금되었는데 2,000명 이상이 투옥됐고, 40여명이 순교했다. 마지막까지 수감되어 있던 중 해방과 함께 출옥한 인사만 26명에 달했다. 이 교수는 “신사참배 반대로 약 150여 교회가 파괴되었고 장로교회는 큰 수난을 감내해야 했다”며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1938년 이후 한국교회는 굴종과 저항이라는 양면적인 역사를 엮어갔다”고 표현했다.

이날 발제에서 이 교수는 한국의 장로교회가 유럽의 장로교회와 달리 신조나 신앙고백, 성례전에 대해 상대적으로 무관심한 특징을 갖게 된 까닭도 소개했다. 선교 초기 내한한 장로교 선교사 중 70% 이상이 미국 선교사로, 미국 장로교회의 인적 영향이 클 수 밖에 없었다. 미국장로교회는 피선교지 교회로서 유럽의 개혁교회와 같은 치열한 신학논쟁이나 신앙고백적 대결을 경험하지 못했던 것. 이로 인해 미국교회적 특성이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수바에 없었다. 이 교수는 “당시 미국 장로교회가 갖고 있던 문자적 강조와 윤리적 엄격성, 부흥주의의 영향으로 한국장로교회는 감성적 측면이 강조되고 개인 전도와 중생을 강조하는 특성을 갖게 됐다”고 했다. 이밖에 “네비우스 정책으로 각국 선교부가 선교지역을 분담했는데 이로 인해 지역에서의 교회 성장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후일 교회분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주장도 있다”고 소개했다.

한편 이날 심포지엄에서는 박찬호 목사(예장 백석)의 사회로 이희성 박사(합동), 연규홍 박사(기장)가 ‘성서신학’, ‘실천신학’ 측면에서 한국장로교회 총회 설립 110주년의 의미를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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