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으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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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으로 만족합니다”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5.2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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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경동노회장 이해우 목사(백석교회)

중학교 선생님에게 복음 듣고 예수님 영접
“노회·총회 맡은 사역, 최선으로 감당할 것”

강원도 삼척 도계에서 나고 자란 이해우 목사는 중학교 2학년 때 담임교사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처음 들었다. 지금은 교사가 학생에게 직접 전도를 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그때 당시 산골의 어느 교사는 제자에게 사영리를 읽으며 복음을 들려주었다. 이 목사가 처음 신앙을 갖게 된 순간이었다. 

신기한 일은 그가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들었던 찬송을 잊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집에 가서도 곡조가 잊히지 않았다. 머릿속을 늘 맴돌았던 이유는 음악에 대한 남다른 재능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만나면서 아무도 모르게 소년의 마음속에 흐르던 음악적 감수성이 발견된 것이다. 

이해우 목사는 노회장에 연임하고 교단 내 중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더 목양에 전념할 뜻을 품게 된다는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해 올해 더 전도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다.
이해우 목사는 노회장에 연임하고 교단 내 중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그래서 더 목양에 전념할 뜻을 품게 된다는 그는 영혼 구원을 위해 올해 더 전도에 매진하겠다는 각오다.

역사적인 선생님과 만남
“영어를 가르치셨는데 학생들에게 늘 전도하는 선생님이셨어요. 박정숙 선생님 때문에 멀어도 교회를 꾸준히 다녔지요. 선생님이 전근을 가셔서 일 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혼자서 다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은 학교를 사임하고 CCC 간사로 헌신하셨다는데, 나중에 만났을 때 목사가 된 저를 무척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광산촌 아이들은 친구 이해우를 만나려면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거친 편이었지만, 친구의 신앙만큼은 늘 인정해주었다. 갑자기 교회에 빠져버린 아들이 걱정돼 부모님은 핀잔도 주었다. 하지만, 신앙을 갖고 성숙해진 아들의 모습에 반대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지나면서 교회는 특별한 재능을 그에게 선사했다. 초등학교 때 곧잘 하모니카를 분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음악을 가까이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음악에 더 깊이 심취하게 됐다. 기타를 치고 피아노까지 섭렵하면서 음악은 그에게 꿈이 됐다. 머리가 명석한 편이었던 그는 특히 암기력이 대단했다.  

“교회를 갔을 때 들었던 곡조를 집에 와서 찾아봅니다. 음과 가사가 전부 기억나니까 찬송가를 뒤지면 모두 찾아지는 겁니다. 찬송가도 전곡을 외웠을 때였어요. 두 달 만에 바이엘을 떼고 교회 반주자에게 물어가며 독학으로 찬송가까지 칠 정도가 됐습니다.”

4부 화성으로 된 찬송가 곡을 혼자 연습해 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는 코드 반주법도 혼자 마스터 했다. 아내를 만난 교회에 처음 갔을 때 음악적 재능 때문에 ‘이상한 사람’이 왔다는 뒷말까지 있었다는 이야기를 훗날에야 듣기도 했다. 

이 목사는 일반 대학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없어 진학에는 실패했다. 낙심하고 있던 그에게 시골교회 은사였던 목사님이 방배동에서 신학을 공부할 수 있도록 추천해 주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는 종교음악을 하고 싶었고, 당시에는 생소한 음악목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기도 했다.

소명을 따라 목회자의 길로
“결국 음악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성경을 더욱 깊이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어릴 적 감리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처음 장로교 신학을 배우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 갈등도 있었죠. 그래서 감리교와 장로교의 장점만 바라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비판하지 않으니까 좋은 것만 보였습니다.”

이해우 목사가 처음 목회자 소명을 받았던 것은 고등학교 때 부흥 집회에서였다. 하나님은 결국 그 길로 인도하셨던 것이다. 부모님은 아들의 첫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다. 당시는 신앙이 없었지만, 아들의 가는 길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나중에 형님들에게 들은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된 걸 크게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이 목사는 이후 학비는 부교역자 사역을 하면서 스스로 감당해나가야 했다. 힘들고 외로운 길이었지만, 그래도 사역이 보람되고 즐거웠다. 

“시골에서 배운 신앙생활대로 했더니 교육부서 부흥은 식은 죽 먹기 같았습니다. 아이들에게 재밌게 성경을 가르치고 북을 메고 거리에 나가 전도만 하면 아이들은 몰려올 때였습니다. 부교역자로 13년을 섬기면서 이제 개척 목회의 비전을 이루어야 할 때가 되었지요.” 

개척 초기 모두가 그렇듯 어려운 순간이 찾아왔다. 성도들이 조금씩 늘어날 때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갑자기 경제적 어려움이 다가왔다. 힘든 순간은 결국 이겨냈다.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목회를 할 수 있는 데는 가족의 힘이 컸다. 지금도 백석교회 목회의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다. 

특별히 이 목사는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어려운 순간에도 든든한 후원자, 무엇보다 기도의 후원자로 곁을 지켜주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목회를 감당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노회장 연임, 더 일하라는 뜻 
평소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탓에 이해우 목사를 찾는 곳이 많다. 올해는 경동노회 노회장을 연임하기도 했다. 코로나19로 인해 어려운 순간에도 노회 사역을 잘 감당했다는 평가라도 하듯, 노회원들은 만장일치 지지를 보냈다. 노회 서기만도 7년이나 역임한 것도 다 이유가 있는 듯싶다.

“목회에 전념하고 싶어 고사도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선후배들이 더 잘하라고 믿음을 주고 기회를 주셨는데 감사함으로 임기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내년 초에는 성지순례도 계획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노회를 이끌 젊은 리더십을 키우고 싶습니다.”

이해우 목사는 교회 개척을 적극 지원하겠다는 각오다. 노회 안팎의 소통이 그래서 더 중요하고, 협력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노회장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목사는 교단 안에서도 여러 가지 사역을 맡고 있다. 총회 교단발전위원회와 총회 전도운동본부, 총회 45주년기념준비위도 섬기고 있다. 외부사역이 많아지는 만큼 마음 한켠에는 부담도 적지 않다. 목회에 더 전념해야 한다는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노회와 총회 사역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해내야 할 값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책임이 주어졌는데 소홀히 할 수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더 목양에 전념해야겠다고 각오를 합니다. 성도들을 더 사랑하고 돌보려고 해요. 특히 교회 밖으로 나가 전도에 힘을 기울이려고 합니다. 한 영혼을 구원하는 목회가 여전히 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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