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다음세대’와 ‘미자립교회’를 위한 목회할 것”
상태바
“죽는 날까지 ‘다음세대’와 ‘미자립교회’를 위한 목회할 것”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2.03.22 23: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아교회 탁균호 목사 / 새서울노회 노회장

가난으로 중학교 중퇴, 끝까지 지켜낸 목사의 꿈
좁은 길 걷는 ‘목회’, 풍성한 나눔사역으로 ‘활짝’
탁균호 목사는 ‘다음세대’를 위한 투자와 ‘미자립교회’를 위한 지원을 사명으로 여기고, 미아교회 성도들과 함께 끝까지 섬기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했다.
탁균호 목사는 ‘다음세대’를 위한 투자와 ‘미자립교회’를 위한 지원을 사명으로 여기고, 미아교회 성도들과 함께 끝까지 섬기겠다는 각오를 이야기했다.

“늦게 신학을 한 아버지는 사당동 지하에 개척을 했고, 우리 가족은 남태령고개 비닐하우스에서 살았습니다. 이웃이 불쌍하다고 무상으로 빌려준 곳이었어요. 아버지는 남루한 집에 또 누군가를 데리고 와 먹이셨던 분입니다. 정말 목사가 싫었는데 중2 때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고 목사의 삶을 결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탁균호 목사(미아교회)는 아버지와 둘이 중학교 자퇴서를 쓰던 날을 잊지 못한다. 입학은 했지만 일 년 동안 아버지는 등록금을 주지 못했다. 개척 교회 목사였던 아버지의 무능이 싫었다. 반 친구들 앞에서 더는 맞지 않아도 됐지만, 공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더 목사의 ‘목’자도 싫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탁 목사는 그토록 싫어했던 목회자의 길을 지금 걷고 있다. 

닥치는 대로 일하고 공부하고
비슷한 연배에 탁 목사처럼 고생한 사람도 별로 없다. 학교를 그만두고 닥치는 대로 일하고 돈을 벌었다. 배달통도 들었고 영안실에서 시신도 닦아봤다. 맞기도 하고 돈을 떼이기도 부지기수. 그래도 돈이 생기면 책을 사고 짧게라도 학원을 다녔다. 검정고시를 합격하고는 대입시험을 준비했고, 누나가 6개월 학비를 대주어서 일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다. 뜬 눈으로 밤을 새며 공부한 끝에 아주대 영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합격은 했지만 대학 등록금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르바이트를 쉰 적도 없다. 1학년 때부터 계속해서 일을 했더니 어느 날인가  각혈을 했다. 너무 힘이 들어 군대라도 가야겠다 생각해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결핵 3기였다. 군의관은 영양실조, 과로라고 했다. 일견 비참한 삶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중학교 때 뜨겁게 만난 하나님을 늘 기억했고, 신앙은 열정적이었다. 대학에서 별명이 ‘목사’, ‘16세기’였다. 사모가 될 여성을 만나야 한다며 미팅 한 번 안 나가는 그에게 붙여준 별명이 ‘16세기’다. 

본격적으로 신학을 하기 전이지만, 그는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겼다. 주일학교는 폭발적으로 부흥했다. 부흥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바쳐 전도하고 양육했다.

“5시간씩 울면서 기도를 가르쳤습니다. 변변한 자료 하나 없이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면 아이들에게 먹을 걸 사 먹이고, 매도 들어가면서 과외 공부도 해주었습니다. 그렇게 돌보다 보니까 2년 후에는 지하 예배당이 가득 찰 정도로 부흥하더군요.”
 
“사람을 모으는 능력이 있답니다”
성공해본 사람이 성공의 맛을 아는 것처럼 부흥을 경험해본 사역자는 또 부흥 성장의 길을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993년 작은 아버지의 추천을 받아 교단 신학교에 진학했다. 지금의 방배동 백석신학이다. 애초 신학을 마친 후에는 안수를 받는 대신 미국 유학을 떠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공동의회 결의에 따라 만 29세 나이에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게 됐다.

영광의 길이 아니었다. 교회에는 20여명 성도 밖에 남지 않았다. 1억 대출 통장을 포함해 각종 빚이 있는 통장이 수두룩했다. “이 교회에 간다고 하니까 다들 만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더 좋은 길이 보였으니까요. 첫 주 헌금이 22만원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3년 동안 목회 사례비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해버렸습니다. 그리고 매일 서울대에 나가 전도를 했습니다. 금방 청년회가 부흥했고, 5년 후에는 예배 공간을 옮겨야 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탁 목사를 잘 아는 선후배들은 지금도 그에게 “사람 모으는 능력이 있다”는 농담을 자주 한다. 첫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교회는 그렇게 부흥했다. 탁 목사는 돌연 시무 7년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미국 목회에서 경험한 부흥의 역사
믿음만 갖고 떠난 유학이었다. 그는 유학 3개월 만에 한인 학생회장이 되었다. 갖은 방법으로 장학금을 모아 학교에 전달했다. 전례가 없는 일이라고 했다. 

“저와 아내는 하나님께서 먹이신다는 생각을 항상 하거든요. 유학을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가 부족했던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학생들이 학비를 모아주고, 저를 모르는 미국 교회에서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늘 그런 일들이 있었어요.”

공부를 마쳐갈 즈음 미국 한인교회 2곳에서 청빙이 들어왔다. 그는 그중 전체 한인이 3백명도 채 살지 않던 노스다코타주를 선택했고 그곳에서도 전례 없는 부흥을 이뤘다. 누군가는 그가 가지 않아도 될 길을 간다고 안타까워했지만, 그의 선택은 하나님만 바라보는 무조건적인 순종이었다. 

하지만 탁 목사는 미국에서 목회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가 암 3기였다. 한국에서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를 해야 했다. 결국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나눔이 풍성한 미아교회 성도들
한국에 들어와 국제학교를 운영하던 차에 지금 시무하는 미아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왔다. 망설였다. 이 교회도 위기를 겪어 교인들이 떠난 아픔이 있었다. 사례비를 밀릴 정도로 재정도 어려웠다. 그런데 탁 목사가 부임하고 2년 만에 확 바뀌었다. 교회가 안정을 찾아갔고 젊은 성도들이 교회를 찾아왔다. 이제는 교회 밖으로 나누는 사역을 풍성하게 하고 있다. 탁균호 목사의 목회 비전을 따라 온 성도들이 동행하고 있다. 

“죽는 날까지 제 목회는 다음세대와 미자립교회를 위한 것이 될 겁니다. 코로나 발병 직전에는 우리 교회 아이들이 더 큰 세상을 경험할 수 있도록 1억원을 모아 미국으로 보냈습니다. 다음세대를 키워야 한다고 설득하며 미국 인맥들을 모두 동원했고요. 미래를 위해 우리 아이들에게 투자했더니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세대 밑거름이 될 겁니다.”

미아교회는 교회 반경 100미터 이내 미자립교회를 수시로 돕고 있다. 절기마다 재정뿐 아니라 식재료, 쌀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해에는 미자립교회 100여곳에 온라인 방송설비를 설치해주기도 하고, 미자립교회 목회자 자녀를 위한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올초에는 교회 화장실 공사를 취소하고 그 재정으로 80개 미자립교회 월세를 지원 했다. 마아교회 성도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나눔의 비전을 실천하고 있다. 

탁균호 목사는 코로나 때문에 교회를 오지 못하는 교인들을 찾아 일일이 도보심방을 하고 있다. 먹을거리를 사들고 정릉, 미아, 수유 일대 골목을 걸으며 성도들 집을 찾아 기도해주곤 한다. 오늘도 탁 목사는 교회에 오지 못한 어느 성도의 집을 찾으러 가며 심방용 등산화 끈을 조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