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어린이 주님께 데려오겠다던 각오, 잊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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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어린이 주님께 데려오겠다던 각오, 잊지 않았죠”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2.03.03 10: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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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_계성교회 신진선 목사 / 의정부기독교연합회 직전 회장

목회의 벼랑 끝에서 계성교회 청빙 후 부부가 장기기증
“트럭에 솜사탕 기계 싣고 어린이들 주님께 인도하고파”

의정부에 위치한 계성교회를 시무하는 신진선 목사. 신 목사는 ‘예유사땅’이라는 계성교회 비전을 소개했다. 예유사땅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의 준말로, 교회와 지역, 북한과 세계선교를 향한 뜻을 담고 있다.
의정부에 위치한 계성교회를 시무하는 신진선 목사. 신 목사는 ‘예유사땅’이라는 계성교회 비전을 소개했다. 예유사땅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의 준말로, 교회와 지역, 북한과 세계선교를 향한 뜻을 담고 있다.

의정부 계성교회 신진선 목사. 그는 신장이 하나뿐이다. 한 때 장기라도 떼서 팔아야 하나 고민을 할 정도로 그의 삶은 어려웠다. 목회가 녹록치 않았던 것. 극심한 가난에서 살짝 벗어났지만 그마저 감사했다. 그런 그가 결정한 것이 장기기증이었다.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감사해서 누군가를 돕고 싶었고, 신장을 이식해주는 것으로 보답했다. ‘부창부수’라고 했나. 김영옥 사모 역시 신장을 기증했다. 부부 모두 자기 것을 하나씩 나누고도 아까운줄 몰랐다. 그저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운 목회를 하고 있다. 

 

뚝방촌 청년, 목사가 되다

“부모님이 결혼 후 무작정 상경을 하셨습니다. 청계천 판자촌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밀리고 밀려 자리 잡은 동네가 답십리 뚝방입니다. 거기가 제 고향이죠.”

답십리 뚝방에서 자란 어린 시절, 보고 배운 거라곤 욕하고 싸우고 도둑질하는 것뿐이었다고 했다. 밤이면 이웃집 싸우는 소리가 담장을 넘는 그런 동네였다. 그런 답십리 뚝방촌 한가운데 교회가 있었다.

“교회에서 뭐 준다고 하면 이 교회도 갔다가 저 교회도 갔다가 그랬습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친구의 전도로 ‘제대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그게 지금까지 이어졌네요.”

당시 박정희 정권은 중소기업을 육성하고자 공업고등학교를 정책적으로 키웠다. 아버지는 우격다짐으로 신 목사를 공고에 입학시켰다. 적성에 맞지 않았지만 열심히 했다. 3학년이 되자 대학에 가고 싶어졌다. 따놓은 자격증은 많았다. 하지만 대입시험을 보기엔 기초학력이 턱없이 부족했다. 포기하려던 순간 그에게 기적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자격증을 가진 공고 3학년 중 전체 석차 30% 이내인 학생에게 전문대에 특채로 지원할 수 있는 전형이 생긴 겁니다. 기뻤죠. 하나님 중심으로 사니, 하나님께서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움직여주셨구나 싶었습니다.”

대학만 졸업하면 뭐라도 될 줄 알았지만, 군대에 다녀오지 않은 그에게 쉽게 취업문이 열리지 않았다. 영장만 기다리던 어느 날 담임 목사를 찾아가 하소연을 했다. 거기서 뜻밖의 ‘신학교 입학’ 제안을 받았다. 

“교회만 오면 행복했습니다.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던 제가 교회만 오면 ‘잘한다’, ‘착하다’ 칭찬을 받았거든요. 목사님의 제안을 받고 기도하는 도중에 ‘신학교에 가려면 돈이 필요하니 부사관으로 임관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관 후에도 목회자의 길을 가야 할지는 불확실했다. 하루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교회를 찾았다. 그날따라 찬송가 460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을 부르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모두가 떠난 예배당에서 혼자 울면서 기도했다. 

“지나온 모든 순간이 필름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내가 너와 함께 있었다’는 음성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불평이 터져 나올 때면 그때를 회상합니다. ‘그래 주님이 함께하셔. 지금도 함께 계셔’ 하며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4년 6개월의 군 생활을 마친 1987년. 전역과 동시에 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백석신학교에는 어린이 선교동아리가 있었다. ‘작은 이들의 모임’이라는 단체였는데, 뭐라도 배워야겠다는 마음으로 가입했다가 2대 회장이 됐다. 어린이 사역과 만난 순간이었다. 이후 교단에서 교사 교육 교재를 만들거나 어린이 여름성경학교 교재를 만들 때면 신 목사도 늘 함께했다. 

계성교회 부임 후 ‘세대 통합예배’를 도입한 것도 어린이를 향한 관심 때문이었다. 부모와 자녀가 같은 마음을 품으려면 떨어져서 예배를 드려선 안 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주일에 한 번 와보세요. 예배시간에 아이들이 돌아다니고 떠들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어요. 아이들은 교회에서 맘껏 뛰어놀아야죠. 그래야 추억이 생기고 그 추억으로 교회를 떠나지 않고, 떠났어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겁니다.”

 

신진선 목사와 김영옥 사모.
신진선 목사와 김영옥 사모.

 

몸 밖에 드릴 것 없으니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지만, 그렇다고 28년의 목회가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두 번째 개척 당시, 성도는 늘지 않는 정체 상황에서 임대료만 계속 빠져나갔다. 보증금까지 까먹는 상태였다. 얼마나 절박했는지, 하루는 고속버스터미널 화장실에서 본 ‘신장 삽니다’라는 스티커가 떠올랐다. 

“터미널 화장실에 가 보니 전화번호가 있더군요. 물어보니 4천만 원을 준다고 해요. 그런데 수술비며 기타 비용을 제하면 저한테 2천만 원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터무니없는 가격에 바로 거절을 하고 교회로 돌아와 울며 기도했죠. ‘하나님 제 신장을 팔 수 있게 하시든지, 교회를 책임지든지 해주세요’.”

하나님의 응답이었을까. 얼마 후 신 목사는 계성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고, 더는 임대료에 시달리지 않게 됐다. 목회가 안정됐을 무렵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전화가 왔다. 장기기증 예배를 드리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예배 당일, 신 목사는 성도들에게 장기기증을 권하는 설교를 했다. 예배 후 모아진 서약서를 살펴보는데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 목사 자신은 물론이고 사모, 세 자녀까지 모두 장기기증 의사를 밝힌 것. 성도들도 출석 인원 중 절반이나 서약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 목사와 사모는 차례대로 신장 이식을 했다.

“장기기증을 한 이유는 딱 하나였어요. 남을 살리자는 숭고한 생각은 둘째였죠. 받은 은혜가 너무 큰 겁니다. 장기를 팔려고 했던 어리석은 과거도 생각이 났죠. 하나님께 드리자. 드릴 게 몸 밖에 없으니 이거라도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신 목사는 올해 환갑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어린이 사역에 남은 생애를 바치고 싶다”고 했다. 어린이에 대한 열정이 식어버린 한국교회에 다시 어린이 전도의 바람을 불러일으키고 싶다는 것. 

“아이들이 없다는 핑계로 전도조차 하지 않는 시대입니다. 어려운 건 맞아요. 그래도 저는 어린이 노방전도에 대한 꿈을 다시 꿉니다. 트럭을 사서 거기에 솜사탕 기계 하나 놓고 예전처럼 탈 인형 쓰고 일주일에 한 곳이라도 찾아가 보는 꿈이요.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한마디만 하면서 솜사탕을 나눠주는 겁니다. 다시 어린이 사역의 붐을 일으켜 보고 싶습니다. ‘전 세계 어린이를 주님께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다시 외쳐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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