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국 영토 확장위한 전쟁, 6계명에 어긋나는 부덕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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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 영토 확장위한 전쟁, 6계명에 어긋나는 부덕한 행위
  • 이상규 교수
  • 승인 2022.03.0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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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규 교수의 초기 기독교 산책 - 초기 기독교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이해(14)

락탄티우스(Lactantius, c. 240~325)는 테르툴리아누스처럼 강력하게 반전 평화사상을 피력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도 폭력과 전쟁을 반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초기 기독교의 평화주의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락탄티우스는 아르노비우스의 제자로서 수사학과 법률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인물이자 라틴고전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문예부흥기의 첫 인물인 페트라카를 비롯한 르네상스 인물들에 의해 ‘기독교의 케케로’(Cicero Christianus)라고 불렸다.

주후 290년경에 디오클레티안 황제(재위 284~305)가 락탄티우스를 로마제국 동부의 수도 니코메디아의 수사학 교수로 초청한 것을 보면 수사학자로서 명성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284년 황제가 된 디오클레티안은 로마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니코메디아로 옮겼는데, 이곳은 콘스탄티노플이 건설된 330년까지 제국의 수도였다. 이곳은 헬라어 사용지역이었는데, 로마제국의 공용어인 라틴어와 라틴 문학을 가르칠 교사가 필요했고, 이 분야에 명성이 높은 락탄티우스를 초청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락탄티우스는 니코메디아로 이주하였고, 수사학 교수로 일하는 동안 기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런데 303년 디오클레티안이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자 락탄티우스는 수사학교 교수 자리를 그만 두고 떠났다. 기독교신자는 공직자가 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을 받음으로 박해가 종식되었는데, 콘스탄틴은 소년 시절 니코메디아에서 인질 생활을 했다. 디오클레티안이 서방의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충성을 담보받기 위해 그의 아들 콘스탄틴을 인질로 데리고 있었던 것이다. 디오클레티안에 이어 갈레리우스가 황제가 되는데, 이때까지 인질로 잡혀있던 콘스탄틴은 306년 초 감시를 피해 탈출하여 서방으로 돌아갔고 후에 로마제국 서부지방의 황제가 되었다. 그가 니코메디아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스승이었던 락탄티우스를 로마제국 서부의 수도 아우구스타 트레베로움(Augusta Treverorum)으로 초청하였다. 그래서 락탄티우스는 니코메디아를 떠나 그리로 갔고, 거기서 노후를 보내고 325년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은 304년 경에 쓴 『신학강요 Divinae Institutiones』인데,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2권에서는 이방종교의 오류, 3권에서는 이방철학의 오류, 4권에서는 참된 지혜가 되신 그리스도, 5권에서는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대한 비판, 제6권에서는 참된 의와 참된 종교, 그리고 7권에서는 종말론을 다루고 있다. 특히 이 책 6권에서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신학강요』 외에도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관하여 De opificio Dei』, 『박해자의 죽음 De mortibus persecutorum』(314년경) 을 썼는데 이 책에서도 전쟁을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보여준다.

락탄티우스는『신학강요』 6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살인을 금하셨을 때 그는 공개적인 폭력을 금하셨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합법적인 것처럼 보이는 부분에 대한 범법도 금하셨다. 전쟁에의 참여는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이와 관련된 하나님의 교훈에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사람을 죽게 하는 것은 언제든지 합법적이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물을 희생제물로 삼으셨다.” 그는 전쟁의 비도덕성을 한탄하였고, 애국(민족)이란 이름으로 전쟁을 정당화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다른 나라에 손해를 끼친 대가로 자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은 덕이 아니라 덕의 파괴”라고 지적하고 선을 옹호한다는 이름으로 전쟁을 옹호하는 행위를 비판했다. 그는 살인하지 말라는 제6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군복무, 사법부의 사형집행, 검투사의 경기와 경기 관람 등에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락탄티우스는 톨스토이의 윤리에 가까웠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백석대 석좌교수·역사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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