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과 안심이 이스라엘을 몰락의 길로 이끌어
상태바
교만과 안심이 이스라엘을 몰락의 길로 이끌어
  • 유선명 교수
  • 승인 2021.11.16 04: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사 28:10)

이제 이사야 예언의 말씀은 에브라임 즉 북쪽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즉 남쪽 유다를 번갈아가며 향합니다. 에브라임은 자만에 취해 판단력을 잃었습니다.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사 28:3) 

술에 취하면 평소에 감춰두었던 본심과 본성이 드러납니다. 술 탓에 실수한 것이 아니라, 평소에 간신히 가리고 있었던 내심이 드러난 것뿐이지요. 에브라임의 내심이 교만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영토가 넓고 산물이 풍부해(‘그 기름진 골짜기’, 4절) 지파들 가운데에도 위세를 떨쳤었습니다. 힘과 지위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힘과 지위를 갖고도 교만해지지 않기는 어려운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가 하늘 나라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어렵다 하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눅 18:25). 교만이 안심을, 안심이 나태를 부르니 이스라엘은 몰락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향락에 젖은 것은 권력자들만이 아니라 제사장과 선지자도 향락에 젖어 하나님의 메시지를 잘못 전하고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하는 꼴이 마치 밥상 위에 구토물을 가득 쏟아놓은 꼴이었습니다(7~8절). 여호와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을 재판하고, 이스라엘의 선지자 대신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 백성들이 나서서 그들을 교훈하지 않고는 희망이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11절).

유다는 달랐을까요? 이스라엘의 선례를 보고 스스로 깨우치기는커녕 더 열성으로 반역과 배교를 저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어도 이방의 강대국들은 두려워했는데, 유다는 다른 나라도 심지어 지옥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큰소리칩니다: “너희가 말하기를 우리는 사망과 언약하였고 스올과 맹약하였은즉 넘치는 재앙이 밀려올지라도 우리에게 미치지 못하리니”(28:15) 마벳(사망)과 쉐올은 망자의 영역을 다스리는 권세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강력한 존재라 해도 사망의 영역에 가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힘을 탐하고 맹약을 맺는 것은 하나님 백성에게 금지된 사악한 행위입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과 하나님을 향한 감사를 완전히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이 세상 어떤 권력도, 아니 저 세상 권력조차도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는 고개를 숙입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브라심 산에서와 같이 일어나시며 기브온 골짜기에서와 같이 진노하사 자기의 일을 행하시리니 그의 일이 비상할 것이며 자기의 사역을 이루시리니 그의 사역이 기이할 것임이라.”(21절) 여호수아는 기브온 골짜기에서 아모리 족속 다섯 왕의 연합군을 물리쳤습니다(수 10:5~14). 여호수아의 외침대로 태양과 달을 멈춰 세우셨던, 전무후무한 기적의 현장입니다. 기적의 대명사라 할 이 이름을 드신 이유는, 이스라엘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이한 능력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로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에도 기적은 성경 속에 고대 역사 속에만 있고 21세기 과학문명의 시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 그토록 자주 나오는 기적의 기록들을 우화나 상징적 묘사로 치부해버린다면, 성경의 어느 부분 어느 명령이 우리 목숨을 걸고 순종해야 할 참 하나님 말씀이라고 확신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믿지 않는 것은 오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가져다 멋대로 우리의 믿음을 만들어내는 오만한 자가 되지 말아야합니다(22절).

백석대 교수·구약신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