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는 북아프리카를 향한 복음의 전진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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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는 북아프리카를 향한 복음의 전진기지”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1.09.02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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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선교를 향해 뛴다// 우간다 송인진 선교사

마스크가 몸의 일부가 된 양 익숙해진 요즘이다. 집을 나설 때도 분신 같던 휴대폰보다 마스크를 더 먼저 찾게 된다. 숨이 턱턱 막히게 하는 것은 마스크뿐만이 아니다. 모이는 것조차 힘들어진 현실에 해외여행은 배부른 소리가 됐다.

하지만 이런 모습조차 부러울 이들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방역은 물론 치료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곳이 상당수다.

아프리카 중심부에 위치한 우간다도 예외는 아니다. 하루 확진자가 수백 명 대로 발표되고는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숫자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부 도시 지역을 제외하면 증상이 있어도 PCR 검사조차 할 수 없는 곳이 대부분이다. 월드비전에서 우간다의 코로나19 감염 위험 인구를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넘는 1,300만 명으로 파악했을 정도다.

코로나19의 위험이 도사리는 이곳에서 복음 전파라는 사명 하나로 현장을 지키며 우간다인들을 돌보는 이들이 있다. 지난 18일 수술을 위해 잠시 한국에 방문한 송인진 선교사(한국중앙교회 파송)를 만나 사역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우간다 현지인들과 함께한 송인진 선교사(아래줄 왼쪽 첫 번째)
우간다 현지인들과 함께한 송인진 선교사(아래줄 왼쪽 첫 번째)

 

우간다 교회의 회복을 꿈꾸며

드넓은 사바나 초원,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피부가 검은 사람들. 그 정도가 당시 아프리카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전부였다. 우간다라는 나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이들이 거의 없었다. 송인진 선교사 역시 그랬다.

처음엔 인도 선교를 꿈꾸던 그였다. 한국외항선교회에 몸담고 인도 단기선교도 2차례나 다녀오며 현지 감각을 익혔다. 하지만 선교회에서 파송한 의료팀을 돕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던 것이 송 선교사의 운명을 바꿨다.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아프리카 선교에 대한 마음은 커져만 갔다.

파송 받은 날짜를 똑똑히 기억해요. 199577일이었죠. 그때 우간다에는 한국 선교사님들이 15가정 정도밖에 계시지 않았어요. 지금은 150가정 정도의 한국 선교사들이 이 땅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우간다는 흔히들 상상하는 것과 달리 기독교인의 비율이 매우 높은 나라에 속한다. 가톨릭의 비율이 42%, 개신교인 성공회 역시 42%에 이른다. 84%가 기독교인인 사실상 기독교 국가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송인진 선교사 역시 우간다 현지 성공회인 ‘Church of Uganda’와 함께 협력 사역을 펼치고 있다.

기독교인 비율이 높다보니 선교 사역에 위협을 받거나 비자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일은 거의 없다. 당시 우간다 성공회에는 2만여 교회가 소속돼있었고 하는 사역들도 꽤나 많았다. 문제는 교회가 이토록 많은 나라에서 무슨 사역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처음엔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간다에 계속 머물다보니 제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보이기 시작했어요. 분명 기독교인은 많았지만 교회를 그저 모이는 장소, 친교를 나누는 장소로 인식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다른 곳이 아닌 교회의 영적 회복이 절실한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우간다 영성훈련센터였다. 한국에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기도원이 모티브였다. 수도와 북서방향으로 430km 정도 떨어진 내비 지역에 영성훈련센터를 짓고 현지 목회자 재교육과 성도 훈련을 시작했다.

 

사역은 하나님의 것

영성 회복 사역이 궤도에 오르자 자연히 시야가 넓어졌다. 다음으로 송인진 선교사의 눈에 띈 것은 주일 하루가 아닌 6일 일상 속 우간다 성도들의 삶이었다.

교회는 열심히 다니는데 삶이 달라지지 않았어요. 주일 하루 교회에 오고 나서 나머지 6일간 삶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단순히 교회는 잘 나오도록 하는 것에서 그칠 수 없었어요. 삶의 현장에서 변화와 회복이 필요했습니다.”

당장 아이들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삶의 질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교육부터 바뀌어야 했다. 송 선교사는 아이들을 위한 유치원을 세우고 교육관을 지었다. 청소년들을 위해서는 실질적인 경제 활동에 활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 교실을 시작했다. 우간다 최초의 노인복지센터(노인선교복지관)를 건립한 것도 송인진 선교사다.

이제는 삶의 회복을 넘어 환경의 회복까지 바라본다. 우간다는 아프리카 치고 비가 많이 오는 편이지만 사람들은 자연을 아끼지 않았다. 나무를 벨 줄은 알았지만 심을 줄은 몰랐다. 송 선교사는 사역 초기부터 사역지 주변에 차근차근 나무를 한 그루 한 그루 심어나갔다. 이제 20년이 넘게 자란 나무들은 송 선교사와 성도들의 그늘이 되어주고 있다.

탄탄대로만 걸어왔던 것은 아니다. 처음 우간다 땅을 밟았을 때, 순종하고 아프리카로 가면 무슨 일이든 생길 줄 알았지만 드라마 같은 역사는 없었다. 초기 5년은 전화도 없이 살았고 창밖에선 반군들의 총소리만이 울렸다. 물질의 어려움은 사역의 동반자처럼 늘 함께 했고 10년 정도 사역했을 즈음엔 번아웃으로 그만둬야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총소리가 오가는 꼼짝 못하는 상황 속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시편 4610절로 너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아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지난 26년을 돌아보니 제가 저의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의 전초기지 우간다

늘어놓기 힘들만큼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는 송인진 선교사지만 아직도 그에게는 꿈이 있다. 그것은 우간다 땅의 약자들과 함께하며 낮은 곳을 향하는 삶이다. 기독교 비율이 80%가 넘는 것이 무색하게 이곳에는 과부와 고아들이 많다. 에이즈로 인해 죽는 청년들이 많은 탓이다. 일자리가 부족하고 성적으로도 문란해 미혼모들도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기회만 주신다면 이 땅에 회복의 동산을 만들고 싶습니다. 정말 인격적으로 아이들을 키울 수 있는, 과부와 고아들, 미혼모들도 행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과수원과 목장을 만들어 생계도 해결하고 함께 말씀을 나누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꿈꾸고 있습니다.”

또 하나의 꿈은 우간다 교회와 한국교회의 다리 역할을 하는 것. 우간다는 북아프리카 이슬람 지역과의 경계선에 있다. 이슬람이 남아프리카에까지 퍼지지 않도록 보루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간다 교회는 지정학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슬람이 남하하지 않도록 막는 방어선이었다면 이제는 북아프리카를 향해 복음을 전할 전진기지 역할을 감당해야 할 때입니다. 다만 한국교회도 우리가 수혜를 베푼다는 마음 보다는 우간다 교회와 동등한 관계에서 협력하고 동역한다는 마음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사역 26년차에 접어들어 어느덧 65. 이제 곧 은퇴를 바라볼 나이다. 송 선교사는 이미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한 준비를 웬만큼 마쳤다. 110에이커에 달하는 영성훈련센터도 처음부터 욕심 없이 우간다 성공회에 소유권을 넘긴 상태다. 학교와 복지관 역시 현지 교단에 소속시켜 그의 이름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다.

이곳에서 나무를 심으며 느낀 것이 있습니다. 찬바람이 불고 나뭇가지 앙상해질 겨울이 되면 잎은 하나둘씩 떨어지죠. 하지만 그때 떨어지지 않고자 애쓰는 나뭇잎은 보지 못했어요.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나뭇잎도 없죠. 선교지에도 놓지 못해 생기는 어려움과 갈등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다음세대를 위해,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해 선교의 아름다운 바통터치가 이뤄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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